당신이라는 알파벳 / 02 _ X와 K
“훠이훠이, 저리 가!”
“나 설거지만 할게. 나도 뭐라도 좀 해야지.”
“아니야, 내가 가만히 있으라 그랬잖아. 썩 저리 가 있어!”
X는 진심이었다. 부엌에 한 발짝도 들지 못하게 했고,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했다. 굳이 지금 대상포진까지 걸렸어야만 했나 싶어 한참 우울해할 때 X는 나의 주말을 책임져 주겠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대상포진에 걸려 몸도 마음도 울퉁불퉁해져 있는데 친구네 집에 가는 게 과연 서로에게 좋을까 싶었지만, 그는 내가 오게 될 경우 어떤 식사와 디저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평소 화려한 상차림을 즐기는 X의 메뉴 구성은 5대 영양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고 상큼하고 달콤한 디저트 역시 매력적이었다. 동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친구네서 주말을 머물겠다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차로 데려다주었다.
회색빛이 살짝 어른거리는 앞치마를 두른 X는 이미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고소하고 담백하고 진한 냄새가 서로 뭉근하게 어울려 맛있는 향을 집안 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요리가 준비되었고 마침내 모든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X는 어떤 음식에 어떤 영양소가 있으며 어떻게 고려하여 상차림을 구성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마치 1인 테이블을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예약해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머물렀던 주말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고는 커피를 내리는 정도. 간단한 설거지를 하기도 했으나 그건 내가 박박 우겨서 쟁취한 결과였다. X는 내가 ‘병자’라는 이유로 자기 침대를 내어 주었고(X의 집에는 공부방이자 손님이 머무르는 방이 있다!) 나는 내가 아플 때까지만 이 특권을 누리겠다고 말했다. 어딘가 좀 어색하지만 유쾌한 누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X의 집은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지인들의 하숙집과 같은 곳이다. 누군가들의 ‘하숙집’이기도 하고 예술가들의 ‘살롱’을 꿈꾸는 그곳은, 꼭 주인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도 하다. 물론 이 경우 안전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탄탄하게 쌓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한데, 그럴 경우 머무는 사람들은 고마움이나 애틋함을 편지로 남기기도 하고 선물로 표현하기도 한다. 덕분에 주인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주인과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는 칫솔들과 물건들이 집 곳곳에 보인다. 끝없이 친구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X가 분명 신기하고 때론 이상하게 보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나 역시 내 집 드나들 듯 X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칫솔이었고 결국 잠옷과 홈웨어 등을 따로 마련해 손님방 서랍장 위에 두었다. 이제는 X의 집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척척 알아버린 나도 이상하다 싶었다.
무일푼, 무월급, 병자. 지난 6개월 동안 X가 나에게 붙여주었던 수식어였다. 처음에는 그게 무어냐고 꽥꽥 소리치며 거부하기도 했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속 편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종종 X의 집에서 주말을 호의호식하며 지내게 되었다. 때로는 X의 집에 드나드는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6개월이 지나면 ‘병자’라는 타이틀은 벗어날 수 있을지 알았는데 여전한 것이 되었고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라면 그 덕분에 난 여전히 가장 넓은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다.
X의 화려하고 풍성한 테이블과 이 공간에 모두 내어놓지 못하는 즐거운 순간들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면, K는 내가 쉬기 시작하면서부터 또 다른 방식으로 외로움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도록 잡아주었다. 바로 책과 글이었다.
아프면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영화도 있고 드라마도 있을 텐데 왜 책인가요’ 하고 질문한다면 역시 할 말은 없지만, 유육종증을 확진받기 전 2박 3일 정도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친구들이 추천한 소설부터 예전부터 읽기를 미루었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책은 아픈 일상에서 꽤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연말이면 잡았던 저녁 약속들이 사라지면서 그 시간을 책이 채워주었고 가끔 책 뒤에 숨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마침 K가 쥐어준 책은 끝없는 시간만큼이나 두꺼워 오히려 읽을 마음이 생겼다. 여행 갈 때 읽으라며 선물했던 책인데 아프지 않고 여행을 했더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그런 책이었다. 부피도 크고 들고 다니기 무거워서 아마 원망을 했을, 하지만 표지가 예쁘고 꼭 한번 읽고 싶은 책이라 버리지 않고 끙끙대며 들고 다닐 그런 책.
K에게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습성이 하나 있는데, 책에 대한 관대한 태도이다. 먼저 타인에게 책을 잘 빌려주고 그 사실을 잊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빌려줬던 것 같은데,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은데’ 라며 굳이 문장의 마무리를 짓지 않기도 한다. 책에 줄 긋는 것도 선호하지 않은 나와는 반대로 K는 자신의 책을 빌려간 사람의 흔적을 개의치 않는다. 형광펜으로 표시하거나 연필로 문장 밑을 그어도 괜찮은 거다. K에게 빌린 책 중에서 줄을 긋고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 있어 줄을 그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괜찮다며 자기는 남들이 남겨둔 흔적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며 책을 읽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지만 나는 쉽게 수용할 수 없는 태도다. 내 책에 누군가의 흔적이 묻는다는 걸, 실은 상상하지 못하겠다. 중고책을 구매하는 것과는 여전히 다른 차원의 무엇이다. 여하튼 책을 구매하고 읽기 좋아하고, 선뜻 내어주는 사람이 친구란 사실은 무척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나에겐 K에게 빌린 책이 몇 권 있다. 나에게 무엇을 빌려 주었는지 기억은 할까. 퀴즈를 내봐야겠다.
책을 읽는 사람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단단한 나만의 세계를 즐겁게 깨는 일이다. 나의 경우, 책을 꽤 오랫동안 읽지 않아 어떻게 시작을 할지 막막한 적이 있었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 어떤 작가의 소설을 선택해야 할지 어떤 책을 시작하면 좋을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을 때 K는 도서관의 사서처럼 적절하게 제안해 주기도 빌려주기도 하며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은 어떨 때는 자신도 읽지 않은 책을 추천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왠지 모를 배신감에 따지다가도 대부분의 책이 흥미롭고 좋았기 때문에 그의 초이스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게 결론이다.
X와 K는 지난 6개월 동안 가장 자주 서로의 안녕을 물었던 사람들이다. 동료이자 소중한 친구가 된 두 사람 덕분에 글에 담기지 않은 수많은 순간들을 토닥이며 보낼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아침 알림이나 서로의 기운을 챙김으로써 때로는 글과 그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돌봄을 하나씩 해나갔다.
함께여서 좋은 시간들과 그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다 고민을 말았는데, 지금의 상태로는 내가 느낀 만큼 누군가를 챙기고 돌보기란 쉽지 않겠다 싶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내어줄 수 있는 정도를 잊지 않고 행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러다 회복의 탄력성이 탄탄해지고 곁을 더 많이 내어줄 수 있을 때, 지금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할 거라 믿는다. X와 K 덕분에 덜 외로울 수 있었고 더 웃을 수 있었던 나의 아픈 시간을.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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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no Nino "Melty Caramelo"
* 이 링크에서 노래를 감상하실 수 있어요(모바일에서 가끔 영상이 틀어지지 않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