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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PD Jul 17. 2021

아버지와 바둑판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미국 파견 근무 당시 팀장님과 바둑을 두곤 했는데, 가끔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포석은 참 좋은데 말야". 크지 않은 차이로 지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듣게 된 말이었다. 객관적으로 큰 실력차가 있음에도 작은 패배로 막을 수 있고, 간혹 이길 수 있는 이유가 괜찮은 포석 덕분이라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바둑 인생(?)을 더듬어 올라가게 한다. 


초등학생 시절, 출장이 잦으셨던 아버지는 잠시 짬이 나실 때마다 바둑판을 가져오라 하셨다. 무거운 바둑판 위에 두 개의 둥그런 바둑알 통을 언저서 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면 "몇 점 깔래?"하고 물으신다. 자존심에 맞바둑을 우기곤 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들어설 때면, 바둑판은 좁아진다. 전투가 벌어지는 작은 지역이 바둑판의 전체로 보인다. 그때 문득 아버님의 한마디가 들려온다. "어이구, 이렇게 넓은 곳도 있네"라고. 넌지시 바둑판 전체를 보라고 신호다. 디테일한 기술은 책을 보라하시고, 지협적인 전투 기술은 그다지 전수해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소를 위해 대를 희생하는 상황은 경계해야 함은 지속적으로 일깨워주셨다.


전투에 지더라도, 전쟁은 지지 말라고 했던가. 하지만 눈 앞의 현실은 그 무엇보다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전투에서는 이겼을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주도권을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운전대를 잡을 때도 바로 앞의 차만 보고 있으면 급정차는 돌발 상황이지만, 멀리 보고 달리로라면, 급정차는 예정된 정차였을 뿐임을 알게 되곤 한다. 그래서 운전을 가르치실 때도, 운전 기술보다는 최소한 3대 앞은 보라고 하셨다.


경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지구를 덮쳤다. 그리고 경제 상황은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었다. 현실 경제를 공부하기에 이렇게 좋은 상황이 또 있을까. 그래서 코로나가 있기 전, 세계 경제를 공부해 보기로 했다. 경제 콘텐츠들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살펴본다. 결론은 코로나 이후의 정책은 2008년 금융위기이후 준비된 메뉴얼대로였다. 그러나 코로나가 등장하기 전에, 눈 앞의 현실이 원근감에 따라 크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정책에 대한 설득은 좋은 경구일 뿐이다. 


멀리 보며 넓게 생각하는 방식은 원근법이라는 자연 법칙에 위배된다. 그런데 인류의 이성의 힘은 자연의 법칙을 수시로 벗어났고 그 결과로 지금의 인류세를 만들었다. 수 많은 위기에 처하면서도 길게 보고 넓게 보는 판단들이 적시 적소에서 나온 결과의 더하기와 곱하기로 여겨진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전략을 꿰뚫고 보급로를 막음으로서 일본 선봉대의 진군을 평양에서 멈추도록 했다. 선조는 의주에서 중국으로 피신을 해야하는 최악의 치욕은 면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과 게르만족간의 갈등의 본질을 파악하고 라인강과 도나우 강을 따라 방어선 구축을 할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 결과 로마는 200년 이상의 팍스 로마나를 누리게 된다. 링컨은 남북이 갈라섰을 때,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의 미국으로 남아야 한다고 결정한다. 현재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은 그렇게 차곡 차곡 기반을 쌓아갔다. 


바둑판을 앞에 두고, 고개를 들어 넓게 보는 노력은 누구의 몫일까. 훈수를 두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가졌을 때, 좋은 훈수도 유효다. 작은 전투가 모여 큰 전쟁의 결과를 결정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전체의 형세를 파악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비효율적인 승리가 되거나, 소탐대실이 되기도 한다. 삶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감정이 치달으면 시야는 좁아진다. 속도가 빨라지면 시야는 더 좁아진다. 자연 법칙이다. 그런데 간혹 그 법칙을 살짝 비켜나가는 이들이 있다.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이 높은게 당연하지 않을까.


눈 앞의 모니터를 보다, 멀리 건물에 간판을 읽어 보려 하기도 한다. 그 뒤에 놓인 산을 한참 바라보기도 한다. 바쁘게 살지만 때론 산정상에 올라 보려 한다.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을 응시해 보기도 한다. 본능에 지배당하기 않기 위한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아버님의 말투까지 생생한 "어허~ 넓다"라는 말로 만들어진 습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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