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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PD Jul 14. 2021

계획대로 되는 게 있나?

인생은 예측 불허, 그래서 삶은 의미를 가진다

바람이 심상치 않다. 늦여름의 노르웨이는 해도 일찌감치 길을 비추기를 마감한다. 6시에 출발하는 배편을 향해 달려가는 차 안은 긴장이 감돈다. 항구에 이르는 길은, 대서양의 파도를 온전히 보여준다. 여행 중 매일 만난 빗줄기지만 오늘은 유난히 굵다. 항구에 다다르자, 페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 배에 오르려 줄을 지어 주차되어 있어야 할 차들은 보이지 않는다. 흰색 차 한 대 만이 비바람 속에 공간을 지키고 있다. 노래 가사처럼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예감 때문이었을까. 아침에 숙소를 출발하면서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를 돌아가야 하는 긴 우회로를 확인했었다. 3시간에서 3시간 반 정도라고 구글 맵은 안내해 주었다. 예약해 놓은 숙소는 바다 건너편에 있고, 배는 운행을 중단한 상황이다. 선택은 우회로 밖에 없지 않냐는 생각에 항구를 빠져나온다. 

Arsvågen Kro 선착장

차 안에는 동요가 일어난다. 잠시 세워보자는 의견을 주류를 이루고 노견에 차를 세운다. 세차장에 들어선 듯 쏟아지는 빗줄기는 길과 함께 달리는 작은 절벽 전체를 폭포로 만들어내고 있다. 아드레날린이 이끄는 대로 검색이 시작된다. 인근에 적당한 숙소가 있는지와 예약했던 숙소의 취소가 가능한지, 우회를 할 경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를 팽팽한 손가락들이 확인해 나간다.


해가지고 있고, 비바람이 거친 상황에 피요르드를 따라 달리는 아슬아슬한 드라이브는 (운전자를 제외한 일행들로부터) 거부된다. 예약 대행 사이트는 비즈니스호텔을 보여준다. 노르웨이 여행 거의 모든 것을 준비해온 동생은 평점이 자신의 기준에 모자란다는 이유로 걱정을 내비친다. 하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다. 딸아이는 예약되어 있던 바다 건너 숙소로부터 무료 예약 취소가 가능하다는 선물을 받아 든다. 큰 바다에 면한 항구를 이용해야 하는 여행객들에게는 드문 일이 아닌 듯하다.


피로가 극에 달하면, 정신력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상황은 계속 이어지곤 한다.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 만나는 터널 속 로터리. 노견도 없다. 내비게이션은 아까부터 지구를 닮은 자전을 계속하고 있다. 느낌에 의존한 선택은 실패다. 한계 테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다시 돌아서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스트레스는 뇌에 필요한 당분을 모두 소모해 버렸다. 마트로 향한다. 결국 아이스크림이 주요 저녁 식사가 된다. 뇌의 당 탐닉은 자연현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도착한 속소. 헤피엔딩이다. 노르웨이에서 처음 들어가 보는 호텔형 숙소인데, 깔끔함과 친절함 그리고 최신식 시설들은 한껏 당겨졌던 신경을 끊어질 위기를 넘기게 하고 미소와 함께 여유를 되찾게 한다


이런 게 여행이다.


십 수년 전, 40여 명의 일행과 미국 서부를 달리던 때의 일이다. 마지막 일정은 오렌지 카운티에서 열린 마라톤과, 마라톤에 초대를 해준 사장님의 갈비 회식이었다. 회식 장소를 향하던 차 안에는 내비게이션은 없었고, 길치인 일행 두 분과 지도를 더듬어 가며 길을 찾는 운전자가 있었다. 간혹 하나의 길이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서로 다른 이름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 함정에 빠지고 만다. 덕분에 20분 이상을 지나친 다음에 유턴을 하게 된다.


차가 이상하다. 균형감각이 무너지면서 핸들 조작이 쉽지 않다. 노견에 차를 세우고 보니, 뒷바퀴 타이어는 너덜너덜 해진 상태다. 눈앞이 깜깜해진다. 랜트를 했던 미니밴은 공간 활용을 최적화하기 위해 스페어타이어를 상식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배치해 두었다. 지금껏 수차례 렌터카로 여행을 다녔지만 타이어 펑크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기 도었다. 심지어 지금 서 있는 곳은 고속도로다.


정신을 차리려 애쓰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아니, 생존을 위한 스캐닝이다. 어바인 외곽이긴 했지만, 주택가들이 제법 있는 동네다. 고속도로변 야트막한 언덕 위로 자동차 딜러 간판이 보인다. 미국에서의 짧은 생활 경험으로 딜러들은 미케닉을 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비상등을 켜고 핸들을 움켜쥐고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온다. 다시 로컬 길을 따라 딜러 샾으로 방향을 잡는다.


다행히 직원들이 퇴근 전이다. 그리고 미케닉도 있다. 어버버 하는 영어를 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동양인들, 어디를 보아도 여행객인 이들에게 그들은 차 아래를 들어가 스페어 타이를 찾아주고 타이어 교체까지 깔끔하게 해 주는 친절을 베푼다. 다 인종이었던 그곳의 직원들에게서 그 흔한 인종 차별적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수리를 마치고 비용을 묻자, FREE 란다. 자신들도 이 특이한 미니밴에 대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다. 


렌터카 회사에 접수했던 사고 신고를 취소한다. 그들은 아직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었다. 미국의 서비스 시스템은 한국인에게는 상당히 견디기 힘든 인내를 강요하곤 한다. 직원들의 명함을 받아 들고 다음 일정을 향한다.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아드레날린이 아직도 우세한 호르몬이다. 심장의 박동은 여전하다.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느냐는 원망도 일어난다. 렌터카 회사에 대해서도 화가 치민다. 예측하지 못한 시간은 끝없는 나락을 안겨준다. 회식 장소에 도착하고도 한참을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 마음은 그 뒤로 오랫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기까지는 또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 또다시 렌터카를 이용해서 로드 트립에 나서는 걸 보면 여행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여행이란 짧은 시간에 삶의 여정을 농축적으로 경험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예측 불허, 그래서 삶은 의미를 가진다


어디선가 만난 이 문장을 더 깊이 간직하게 된다. 계획한 대로 예측한 대로 살아진 적이 얼마나 되었나를 복기해본다. 계획은 세워보지만, 큰 골격이며 바람일 뿐, 삶은 계획 속에 포함되지 않았던, 포함하고 싶지 않았던, 포함될 리가 없다고 믿었던 상황에 대한 대처로 채워진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다가온 손길로 따뜻해지기도 한다. 만약 계획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어땠을까. 평화로웠을지는 몰라도, 미소를 지으며 회상할 수 있는 인생은 없으리라. 


모뉴멘트 벨리에서 인디언들이 라이딩해주는 투어 중이었다. 가이드가 흥미로운 설정샷을 제안한다. 우연히 알아들은 가족들은 일사 분란하게 움직인다. 그러던 중 한 분이 작은 알갱이들로 만들어진 모래사막에서 미끄러진다. 적당히 고운 모래들은 무플에 뼈는 안 보이는 정도였지만 상당히 깊은 상처를 남긴다. 가이드는 빠르게 구급약 상자를 들고 온다. 임시 처방은 가능했지만, 의사가 필요해 보인다.


급하게 모뉴멘트 벨리 투어의 시작점인 The View 호텔로 돌아와 의사를 찾는다. 어렵게 만난 그녀는 여기서는 응급처치만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머리들은 빠르게 돌아간다. 황량한 사막으로 가득하고 그런 환경이 이곳을 인디언 성지가 된 지역에서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바로 가까이에 병원이 있었다.

모뉴멘트 벨리 병원

병원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라 기다리란다. 가족들은 조용한 병원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 또한 그저 여행의 일부일 뿐이니까. 오후에 계획된 일정은 변경하면 된다. 지금 집중한 일은 치료일 뿐이다. 햇빛이 병원 천장에 열린 둥근 창을 통해 바닥에 떨어진다. 무릎에 상처를 입은 누님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뿐이다. 어느 누구도 아드레날린으로 고통스럽지는 않다. 


긍정의 기운 덕분이었을까. 빠르고 친절한 치료를 마치고 조금은 딜레이가 되었지만 다음 목적지를 향한다. 좀 전의 상황에 대한 수다가 동행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그 순간의 사진은 여행을 들려준다. 그리고 또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어떤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를 모르기에 용감할 수도 있다. 매 순간이 여행의 일부분임을 알기에 길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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