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규 May 21. 2024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

서울에 편입되지 못한 마지막 조선 시흥군

굉메마을, 광명이 되다

1914년 당시 시흥군은 북쪽으로 한강, 서쪽으로는 목감천을 경계로 두고 시내 영등포읍, 그 남쪽 동면(지금의 시흥동)을 중심지로 삼고 있었다. 동면에서 서쪽으로 가면 안양천이 있고, 안양천과 목감천이 만나는 곳으로 넘어가면 안양천과 목감천 사이의 땅, 시흥군 서면으로 넘어간다. 서면에서 남쪽으로 도덕산 자락을 따라 내려가면 등잔을 얹어 놓는 기구인 광명두와 비슷하다 해서 괭매마을이라 하는 자연마을이 있다. 이 괭매마을이 있는 동네를 괭매마을에서 따서 광명리라 했는데, 이 광명리가 지금의 광명시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그래서 이 괭매마을을 광명의 기원이라 해서 원광명이라고도 한다.

또는, 광명은 중세 언어로 “검밝다”라는 뜻으로 “밝은 임금”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1910년 당시의 광명시 일대. 광명시의 이름이 비롯한 원광명이 도덕산 왼쪽에 보인다. 도덕산-구름산 산맥이 시 중앙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금에야 광명시 한가운데에 산을 남으로 끼고 서울시와는 강으로 경계를 지은 북쪽의 광명동과 철산동 일대가 광명시의 중심지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편, 한국 개신교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면에 선교를 왔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서면의 중심지인 소하리 쪽이 아닌 광명리에 광명교회를 1903년에, 하안리에 하안교회를 1905년에 개척했다. 당시 광명교회 교인들의 대다수는 충청도, 황해도, 말죽거리 등의 이주민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광명리의 광명교회는 마치 이후 이주민들로 새로이 발전하는 광명동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두 교회는 지금까지도 광명에 그대로 있다.

옛날에는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을 양, 산의 북쪽, 강의 남쪽을 음이라고 했다. 양, 곧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은 햇볕이 잘 들고 찬 북풍을 산이 막아 주므로 살기 좋은 땅이었다. 반면, 음, 곧 산의 북쪽과 강의 남쪽은 겨울에 북풍과 강바람이 겹치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살기 나쁜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안양천과 목감천은 상습 범람으로 골치를 썩이는데, 하천 정비조차 잘 되어 있지 않은 당시에는 두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원래는 광명이 아니라 소하가 중심

그래서 괭매마을도 도덕산을 동쪽으로 파고든 분지에 있고, 서면 면사무소도 구름산 남쪽 평지의 소하리에 있었고, 경찰 주재소도 괭매마을보다 더 남쪽의 노온사리에 있었던 것 같다. 소하리는 안산, 시흥 사람들이 서울을 왕래할 때 꼭 지나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발달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서면 자체가 큰 고을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1932년 서면에는 5985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 일본인은 4명뿐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도 주목하지 않는 곳이 서면이었다. 이런 서면도 수도권이 발전하면서 조금씩 개발되기 시작하는데, 그때에도 처음 사람들이 주목한 곳은 소하2리, 지금의 소하1동에 있는 새말, 한자로 신촌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1968년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여의도에서 강제 이주한 주민들 일부가 이 새말까지 흘러 들어와 여의도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고, 이후 신촌은 안양천 제방 주변부로 확장되었다.


광명을 도시로 만든 개봉 60만 단지

이대로 흘러갔으면 소하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도시로 발전했을 광명의 역사는, 이웃한 옛 시흥군 동면 일대의 1963년 서울 편입을 계기로 격변하기 시작한다. 안양천과 목감천 너머까지 서울이 확장되지는 않았으나, 1963년 9월에는 광명리와 철산리가 서울 도시계획에 편입되었다. 1965년에 구로공단이 건설되면서 공단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필요해지자, 당국이 주목한 곳이 바로 개봉동, 그리고 서울 너머 광명리와 철산리였다.

1968년 5월 14일, 개봉 60만 단지라 불리던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광명리와 철산리 일부를 대한주택공사가 일괄 개발하였다. 광명 최초의 아파트인 광명사거리의 광명아파트와 철산동 일대의 광복회와 미망인회 등 원호 대상자를 위한 광복아파트도 이때 들어섰으며, 개봉동 일대와 함께 인구밀도가 낮은 단독주택지구도 조성했다. 총 3만 5천 명이 사는 미니 신도시 규모였다. 1960년대 시흥군 서면의 인구가 약 1만 2천명에 불과했으니 서면 전체 인구를 넘어서는 엄청난 인파가 몰아닥친 것이다. 광명아파트와 광복아파트는 모두 재개발되어 지금의 광명한진아파트와 광복현대아파트가 되었다. 한편 철산리 일대에는 싼 방값을 찾아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이 노동자들이 쉽게 통근할 수 있게 1977년에는 서울시에서 철산대교를 지었다.

반면에 원래 서면의 중심지인 소하리를 포함해, 광명리·철산리의 일부와 나머지 서면 거의 대부분은 1971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광명시 면적의 64%가 개발제한구역이다. 이 때문에 소하리는 쇠퇴하고 광명의 중심지는 택지개발과 도시화가 진행된 광명리 지역이었다. 이에 지금의 광명5동 자리에 1970년 시흥군 서면 광명출장소를 열었고, 1974년에는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으며, 1979년 4월에는 서면 전체가 소하읍으로 승격되기까지 했다.


기아자동차 소하공장과 광명

서울시와 경기도 사이의 힘겨루기에 지친 기아자동차에서 직접 지은 안양천 기아대교. 기아자동차는 소하리공장을 통해 광명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대부분이 구로공단의 배후 주거지로 개발된 광명이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인해 소하리 일대에는 1973년 기아자동차 소하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소하공장은 기아산업의 네 번째 공장이나, 본격적인 기아산업의 자동차 생산은 바로 이 소하리공장 준공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소하리공장과 함께 기아산업은 최초의 국산 엔진을 제작하고, 1974년 10월에는 마침내 기아 최초의 승용차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소하리공장 주변에는 기아로·기아대교·기아천 등 기아에서 따온 지명들이 있을 만큼, 기아와 광명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개발제한구역에 공장이 세워진 탓에 불법 증축 문제로 여러 차려 골치를 앓다가 2008년에 들어서야 관련 법령이 개정되면서 합법 증축이 가능해졌다. 기아대교는 원래는 행정 당국에서 기아산업에 지어주기로 약속한 다리였지만, 안양천을 사이에 놓고 서울시와 경기도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바람에 지체돠자 기아산업이 자체적으로 2억 원을 부담해서 지은 다리다. 하안동 일대에 영세 기업이 있기도 했으나 광명시 탄생 이후 하안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철거되었고 1992년 광명시범공단이 조성되어서야 미약하게나마 광명에도 공단이라 할 만한 것이 들어서게 된다.


서울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1976년에 서울에서 광명리를 서울에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고, 1979년 영등포구와 관악구를 분할해 구로구와 동작구를 설치할 때, 광명리와 철산리를 서울에 편입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던 사이 광명리와 철산리의 인구는 빠르게 급증해 광명리에는 총 36리, 철산리에는 총 17리 합쳐서 무려 53리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행정리가 설치되었으며, 시 승격 직전 1981년 시흥군 소하읍의 인구는 15만 3997명에 달했다. 현대 농어촌 혜택을 노리고 분동을 꺼리는 수많은 과밀 읍들도 감히 당해낼 수 없는 역대 최대 인구를 자랑한다.

위의 기아대교 건설 뒷이야기에도 보듯이, 서울시는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광명시 일대를 개발해 놓고도 광명 주민들, 대다수가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인 이들의 필요에 대해서는 자기 관할 구역이 아니라고 뒷짐 지는 행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광명리와 철산리의 서울시 편입 문제도 이처럼 시간만 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광명시의 서울 의존은 적지 않아, 전기도 한전 영등포지점에서, 수도도 구로구청에서, 전화도 개봉전화국에서 처리하고 있었으며, 전철도 개봉역에서 타고 있었다. 광명에 직접 전철이 다니기 전 개봉역은 한때 무려 10만 명이나 타고 내린 적도 있었는데, 그만큼 광명 시민들은 서울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광명의 서울 편입이 질질 늘어진 이유는 서울시의 인구가 서울시의 예상 밖으로 폭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0년 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850만 명을 바라보고 있었고, 2000년대에 가면 1400만을 돌파할 것이라는 UN 조사보고서가 나올 지경이었다.


1983년,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의 탄생

쿠데타를 일으켜 막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11월 서울의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서울 주변에 15-30만 명 인구의 위성도시들을 두는 정책을 폈고, 이에 따라 1981년 7월 1일에는 시흥군 소하읍 광명출장소 전체가 광명시로 승격했다. 마지막 조선 시흥군의 잔재인 시흥군 서면 지역은, 이렇게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시로 다시 태어났다. 시로 독립하고 1년 만에 광명시는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서 해제되어, 원치 않았던 독립을 이뤄냈다. 1983년, 시흥군 옥길리 일대를 부천시와 함께 나눠가지면서, 광명시의 경계가 완성되었다. 이와 함께, 시흥군은 의왕읍과 맞닿은 화성군 반월면의 일부를 또 받아왔다.

1983년 시흥군과 영등포, 안양, 관악, 구로, 동작, 광명 여섯 딸들.

 



이전 07화 시흥의 넷째 딸, 구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