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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규 May 21. 2024

시흥의 넷째 딸, 구로

구로공단이 구로구를 낳다

구로구와 동작구의 생일은 같은 1980년 4월 1일로, 각각 영등포구와 관악구에서 갈려 나왔다. 구로구가 동작구보다 더 사람이 많고, 당시 구 서열도 구로구가 동작구보다 앞섰기에(1979년 10월 25일 조선일보 6면) 비록 쌍둥이라고 해도 구로가 넷째, 동작이 다섯째가 되겠다.

구로구 지도. 가운데 고척1동과 구로2동 사이의 경계를 안양천이 지난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구로구는 구 한가운데가 허리처럼 잘록하게 들어갔고 그 허리를 안양천이 관통하는데, 이런 지형은 우연이 아니고 안양천 이서는 예전에는 부평, 부천이었고 안양천 이동은 시흥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시흥의 딸들은 오로지 1914년 시흥에서만 비롯했기에, 구로가 시흥의 딸들 중에서는 첫 혼혈(?)이라 하겠다. 그러나 구청이 안양천 이동에 있으므로, 어찌되었든 구로도 시흥의 딸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구로구 일대는 시흥과 부천의 변두리 땅에 불과했고, 1963년 서울로 편입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서울에서 몰려난 빈민들이 무허가주택을 짓고 살고 있었고, 그들을 위해 1961년 당시 공영·간이주택 2300세대를 지은 적이 있었다.

1968년 구로 무역박람회 개최. 공공누리 제1유형에 따라 서울역사박물관(https://museum.seoul.go.kr)의 공공저작물 이용.

이 땅이 지금처럼 발전하는 것은 1967년 지금의 구 이름이 비롯하는 구로동 일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수출산업공업단지인 구로동수출산업공업단지, 줄여서 구로공단이 세워지면서부터다(동아일보 1967년 4월 1일 1면). 구로공단은 14만평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4월 10일 기준으로는 재일교포 18개 공장, 미국인 1개 공장, 국내인 9개 공장 등 29개 공장과 정밀기기센터 기술원 양성소가 세워졌고,(경향신문 1967년 4월 10일 6면) 공사비 2억 7천만원 중 2억 6천만원을 정부가 보조·융자하였다(매일경제 1967년 11월 1일 3면). 5월 16일에는 입주사 중 아동을 취소하는 대신 남성흥업과 칼 오리엔트 무역주식회사를 추가해 총 30개 공장으로 입주지정을 완료했다(매일경제 1967년 5월 17일 2면). 이렇게 구로동에 제1단지가 건립되었을 당시에는 입주 희망 기업이 적었으나 이후 늘어나자 이에 맞추어 가리봉동(지금의 금천구 가산동)에 1968년에는 2단지가 준공돼 15개 공장이 설립됐고, 1973년에는 3단지가 준공되었다. 2단지와 3단지가 경부선으로 단절되어 있기에 이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고가육교가 오늘날 서울디지털산업단지를 연결하고 있는 “수출의다리”인데, 상습 정체 구간이라 수출의 다리가 아니라 “수출 저지의 다리” 아니냐며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다.

구로공단은 가동 첫 해에는 백만 달러 수출실적을 올렸으나, 10년 뒤에는 10억 달러를 수출해 국내 수출액의 10%를 차지하며 재봉틀을 돌리는 여공들로 상징되는 섬유 수출 1번지로 성장했다. 1970년대의 구로공단은 섬유 외에도 봉제·가발·소형 전자기기 등 경공업 위주의 산업 단지였으나, 산업 구조의 변화와 공장 노후화 등의 문제로 침체되면서 1997년 '구로수출단지 첨단화 계획'을 세우고 2000년에는 이름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고쳤다. 그 결과 벤처·정보·지식기반산업 위주의 첨단산업단지로 빠르게 개편되어 부흥을 맞이했다. 2023년 말 디지털산업단지를 대표하는 업종은 54.8%를 차지하는 지식기반산업이 되었다.

한편 온수동 일대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공업단지인 서울온수일반산업단지가 '영등포기계공업단지'라는 이름으로 1970년에 인가를 받아, 1973년에는 기계금속 및 비철금속 적격단지로 지정되었다.

구로공단이 완공되면서 구로공단 일대에 살고 있던 농부들은 공단 노동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공단의 인력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었고, 전국에서 구로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공단의 수요를 채워주었다. 이렇게 한적한 농촌이던 구로구 일대는 공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북적대는 현재의 모습으로 급격히 변모하였다.

수많은 주택이 구로구 일대에 생겨났으나 체계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개발된 주거 지역은 바로 개봉동 일대였다. 구로구 일대는 비록 개발되지는 않았으나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개발의 잠재력은 풍부했다. 그 교통의 경부 축을 따라 공업단지가 개발되었다면, 경인 축에 놓인 개봉동 일대는 주거지역으로 개발된 것이다.

대한주택공사는 1969년 택지조성사업에 들어가고 1970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 1차로는 시흥군 광명리(현 광명시 광명동) 30만평, 2차로는 개봉동 30만평 등 총 60만평에 달하는 택지를 71년까지 조성했다. (매일경제 1976년 7월 12일 '서울의 뉴타운 9 개봉지구') 이 조성된 토지 위에 주공아파트가 1971년 9월 준공되었는데, 처음에는 높은 집값을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아무도 선뜻 들어오려 하지 않았으나 1972년 임대단지로 전환하자 1차 5월 9일 250가구 입주자 모집에 무려 3339명이 몰려들어 담당이사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매일경제 2009년 8월 21일 [아파트 이야기] 개봉아파트) 물론 광명리가 포함된 만큼 이 택지조성사업은 광명시의 기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어차피 광명시도 시흥의 딸이니 그때 이야기하자. 사실 개봉동이 대표하는 안양천 이서 지역은 원래 시흥이 아니긴 하다.

이렇게 구 시흥군에 세워진 구로공단의 발전과 구 부천군에 갖춰진 주거 개발로 인해 구로구 일대도 성장해, 구로공단이 막 들어섰을 1970년의 인구는 (영등포구의 일부로서) 25만 5172명이었으나 1975년에는 34만 2526명, 분구 직전인 1980년에는 56만 8993명에 달했다. 결국 1979년 당국은 다시 인구가 백만에 육박해가는 영등포구를 도림천을 기준으로 나눠 구로구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결정 당시 신 영등포구의 인구는 43만 4896명에 면적은 27.58 km2, 구로구의 인구는 51만 7963명에 면적은 39.37 km2으로 구로구가 영등포구보다도 더 컸다. 이와 함께 관악구 일부를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시흥군 광명리와 철산리를 구로구에 편입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다.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시흥의 넷째 딸, 구로는 이렇게 태어났다.

1980년, 시흥군과 다섯 딸들, 영등포구, 구로구, 동작구, 관악구, 안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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