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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규 May 21. 2024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

한강인도교와 영단주택, 노량진수산시장.

동작구의 이름이 유래한 동작진 근처를 지나 동작대로로 이어지는 동작대교.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1914년에 시흥군에 합병된 이전의 과천군은 한강을 끼고 있어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노량진 곧 노들나루와 동작진 곧 동재기나루다. 지금은 둘 다 동작구에 있다.

노량진은 백로 또는 버드나무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하고, 동작진은 검붉은 구릿빛 돌들이 많은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며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는 제6·7·8호 간선로에 있었고, 동작진 역시 제6·7호 간선로의 경유지로 꼽히며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 급제하고 고향길로 돌아가는 길에 언급되는 서울과 삼남 지방을 이어주는 나루였다. 조선에서 더 중시한 것은 노량진 같은데 구의 이름은 노량구가 아니라 동작구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어쩌면 동작진은 동작대교를 거쳐 동작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에는 한강의 나루터로서 번성하였고 경인선 노량진역이 세워지기도 한 동작구 일대는, 1917년 한강인도교가 건설되면서 변화를 맞기 시작한다.

1917년 준공된 한강인도교 전경.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srd-239198).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도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없는 자동차로 강을 건너고자 다리를 놓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배 대신 다리로 강을 건너면서 나루터는 쇠퇴했고, 나루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동작진 주민들은 한강변에서 자그마한 돌멩이 즉 사리를 채취하면서 여전히 괜찮은 소득을 올렸으나, 동작진을 관할하는 시흥군수였던 일본인 신미수(神尾修)라는 사람이 조선사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리채취권을 확보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사리 채취 노동자도 동작진 주민이 아닌 외지인을 불러다 쓰면서, 한때 건너편 검은돌(흑석리) 사람들이 부자 동네라고 부르던 동작진 주민들은 반대로 살길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한편 1941년 설립된 조선주택영단은 영등포공업단지의 배후 주거지로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상도동과 대방동에 영단주택을 건설하였다. 이는 조선주택영단의 첫 사업지였고, 지금도 주거지역이 대부분인 동작구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하겠다. 상도동의 영단주택은 동작구 독립 당시인 1980년대까지도 그 모습이 지속되었으나 이후 도시계획이 실시되면서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노량진 일대에도 주거지역이 조성되는데 이는 1967년 첫 유료 자동차전용도로인 강변1로(현 노들로)가 한강의 범람을 막는 제방 구실을 해주면서 가능해졌다. 1971년에는 지금의 노량진수산시장인 한국냉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1976년의 노량진 수산시장의 모습.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H-TRNS-84344-765).

동작구에는 숭실대학교, 중앙대학교, 총신대학교 세 사립 대학교가 일찍이 들어서 있었다. 숭실대학교는 1957년부터 상도동에 자리를 잡았고, 중앙대학교는 1933년 흑석동에 들어왔고, 총신대학교는 1961년 사당동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노량진을 한때 유명하게 만든 고시원과 학원가는 이와는 기원이 다르다. 원래 종로에 있던 대성학원이 1975년 노량진으로 이전해 왔고, 1977년 정부가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 계획을 세우면서 사대문 안에 있던 학원들이 줄줄이 노량진으로 옮겨 온 것이다. 수능 이후 수많은 학원들이 대치동으로 옮겨가고, 그 빈 자리를 공무원 학원이 채우면서 공무원 수험생을 노린 고시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이는 동작구 탄생 이후이니 여기까지만 하자.

동작구 일대는 1936년 영등포가 시흥에서 서울로 편입될 때 함께 영등포의 일부가 되었고, 1973년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될 때 관악구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웃 영등포처럼 관악구의 인구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불어나면서, 영등포에서 구로가 분리될 때인 1980년 4월 1일 관악에서 동작이 분리되어 태어났다. 이때 관악구 일부 동들을 영등포로 복귀시키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동작구는 상도동과 봉천동 사이의 능선을 따라 관악구와 경계를 지었고, 면적 16.76 km2, 인구 38만 8365명을 관할하게 되었다. 면적으로는 서울시 구 12위, 인구로는 16위에 해당하는,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의 탄생이었다.

1980년, 시흥군과 다섯 딸들. 동작구는 관악구의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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