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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규 May 20. 2024

시흥의 둘째 딸, 안양

영등포를 상실한 시흥의 새 중심지로 발전하다

시흥에서 가장 큰 지방인 영등포가 경성으로 편입되면서 시흥은 새 중심지를 찾아야 했다. 영등포 이전 시흥의 중심지인 지금의 시흥동 일대, 당시로는 동면 일대에 다시 기회가 온 것일까?

시흥군 지형. 동면은 관악산 북쪽에 있다.

그러나 과천과 안산 일대까지 아우르는 거대 시흥군에서 동면은 이제는 북으로 너무 치우쳤고, 관악산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관악산 남쪽까지 소통하기 어려웠다.

안양의 지명이 유래한 안양사 터에 남은 귀부 정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동면 대신 새로 주목받은 곳은 지금의 안양시로 성장하는 구 과천군 서부, 당시 지명으로는 서이면이었다. 서이면은 구 과천군의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조선 정조의 개발을 거쳐 시흥군에서 구 시흥, 과천, 안산 세 지역과 모두 맞닿은 곳으로서 교통의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1905년 경부선 개통 당시에 안양역도 세워졌는데 이는 1908년에 개통된 시흥역보다도 더 이른 것이다. 일제 시대인 1926년에는 이런 이유로 인해 안양시장이 서이면에 세워져 번창했다. 다음은 1927년 6월 1일 동아일보 기사로, 3일 후에 열리는 안양시장 1주년 기념식 예고 기사다(맞춤법은 당시를 따르되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 고치고 띄어쓰기 삽입.)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 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장차 발전의 여지가 충분하므로 동 면에서는 작년 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이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욱히 안양 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 (단오일)을 기하여 전 시장 1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조산청년의 소인극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급 동화동요회 등이 잇서 만흔 흥미가 잇슬리라더라”

1941년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안양의 이름이 드디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안양이란 이름은 어디서 나왔을까?

안양 발전의 시작이 된 화산능행 길의 만안교. 위키미디어 만안교에서.

안양의 지명은 고려 태조 시대에 지어진 안양사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 안양사 터는 지금의 석수동, 당시 시흥군 동면 안양리에 있었다. 안양사가 있었기에 이 주변을 안양리라 불렀고, 그 안양리는 동면과 서이면 양쪽에 모두 있었다. 시흥군의 중심지인 시흥군청이 있던 동면이었기에 오히려 시흥군 동면 안양리는 시흥군청에 묻어갔고, 정조가 친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능행 경로를 이 서이면 안양리(당시에는 과천군 안양리)를 지나게 하면서 안양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등포가 떨어져나온 시흥군의 새 군청은, 바로 안양이었다. 1947년 11월 29일, 시흥군의 관민들은 함께 모여 성대하게 안양읍이 시흥의 새 중심지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시흥군청 낙성식에 참여했다.

1947년 당시 시흥군, 영등포구, 안양읍과 시흥군청의 이전 과정.

그래도 아직까지는 시흥의 역사적 중심이었던 시흥동이 있는 동면이 남아 있었으나, 1963년 서울 대확장 때 시흥군 북부의 동면 대부분과 신동면이 편입되면서 드디어 시흥군에 시흥이 없어지고 만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이름을 시흥이 아닌 과천으로 하지 않았을까? 결국은 시흥·과천·안산 3군이 합해진 시흥군에서, 구 시흥군의 대부분은 서울로 편입되고 시흥과 과천의 경계 지역이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 성장해 군의 새로운 중심 지역이 되었으니까. 지금도 시흥동은 금천구에 있고 시흥시에는 시흥동이 없어서 시흥시와 시흥동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가끔 나오는데, 시흥·과천·안산 통합 군의 이름이 과천이었다면 시흥시가 아닌 다른 이름을 쓰고 있었을 테니까. 무슨 이름이 되었을지는 시흥의 또 다른 딸 과천이 나올 때 생각해보자.

서울 대확장과 맞추어 옛 시흥군 서이면이었던 안양읍은 동면과 남면의 일부 지역으로 확장한다. 안양이 과천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과천과 시흥을 아울러 발전한 도시임을 보여주는 조치라 하겠다. 이렇게 시흥군은 안양읍을 기반으로 한 새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1963년의 시흥군, 시흥군 북부를 편입한 영등포구, 그리고 시흥군 동면과 남면 일부를 편입한 안양읍.

옛날 사람이라면 남양주시가 옛 농촌 남양주군과 옛 도시 미금시가 합한 도농통합시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이와 같이 같은 군에서 시가지와 농촌이 갈려나갔다가 도농복합시를 도입하면서 통합된 지역이 경기도에서는 남양주 외에도 평택+송탄이 있다. 이렇게 도농통합시가 만들어진 까닭은 그 전에는 농촌에서 도시를 분리해 시로 만드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으나 이 정책의 부작용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찍이 도시 지역이 발달한 곳에서는 군이 잘게 쪼개져 도시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 경향이 가장 극심한 곳이 바로 이 시흥이었다. 시흥에서 열두 딸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73년의 시흥군, 영등포구과 시흥군에서 독립한 안양시.

시흥군에서 가장 번창한 안양읍은 이 도농분리 정책에 따라, 1973년 안양시로 분리된다. 시흥시의 둘째 딸, 안양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흥군이 영역을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1963년에는 화성군 일왕면(의왕면), 1973년에는 부천군 소래면이 대신 시흥군으로 편입되어 왔다. 이렇게 해서 시흥군은 안양시를 동서에서 감싸는 거대한 군이 되었지만, 영등포, 시흥(동면)에 이어 안양까지 중심지를 세 번에 걸쳐 잃으면서 발전의 축을 연이어 상실하고 있었다.

군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부의 독립과 이로 인한 구심점 상실, 이것이 시흥에서 열두 딸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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