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정욱이 태어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녀의 병명이 백혈병이었다는 것을 29년이 지나 정욱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 4살이었던 나는 30년 가까이 살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과정을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엄마에게 할머니의 투병과 죽음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복기할 수 힘든 기억이었을 거라 이제와 생각한다.
할머니와 정욱이가 같은 백혈병인 것이 무슨 얄궂은 우연인가 싶은데 정말 우연이란다. 구글 검색을 했을 때도, 세브란스에서도, 성모에서도 백혈병은 유전병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숙이 트라우마가 있는 엄마는 정욱이한테 죄책감을 느끼시는 것 같다. 예전에도 엄마는 종종 정욱이가 태어날 때 본인이 너무 슬펐고, 그 후에는 일하느라 정욱이 사진도 많이 찍어주지 못했다고 미안함을 드러내셨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할까.
이제와 알았지만, 외할머니는 아주 많이 힘들어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정욱이가 있는 무균실엔 하루 한 명, 한 시간만 면회를 할 수 있는데, 할머니의 기억에 엄마는 무균실에서 보호자가 없을 때 환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걱정이 앞서시나 보다. 29살의 엄마에겐 엄마가, 59살의 엄마에겐 29살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으니 이 병이 얼마나 증오스럽고 무서울지.
정욱이가 눈앞에서 저렇게 아프니까 갑자기 1988년 엄마의 몸에 들어간 느낌이다. 엄마를 여의였을 때, 29살 내 엄마가 어땠을지, 그리고 이후 엄마의 부재를 30년간 쉬지 않고 느꼈을 그 막막함이 35살의 내가 이런 일을 겪으면서야 헤아려지는 게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