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성경을 많이 읽기도 하고, 진지한 신앙을 갖고 살았다고 자부했다. 가톨릭과 기독 신앙의 핵심이 되는 예수의 대속, 죽음 등도 1년에 한 번쯤은 반드시 묵상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의 성스러움. 신의 아들이 사람이 돼서 인간과 같이 피를 흘려가면 죽었다는 이야기. 왜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표현이 필요했을까. 왜 '피'였을까. 정욱이가 매일 수혈을 받다 보니 그제야 피의 의미를 알게 된다. 십여 년간 묵상하던 예수의 죽음은 그저 책 속 이야기에 불과했었다.
피는 머리부터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온몸을 돌아다닌다. 온몸에 영양분과 면역세포를 흘려 그 자체로 사람을 살아있게 한다. 그러므로 혈액암이라면, 전신 암이다. 그래서 혈액암을 판정받는 순간 바로 말기이다.
'폐암 말기입니다'
'간암 말기입니다'
와
'백혈병입니다'
는 영 다르게 들린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의 유일한 치료법인 골수이식은 피를 형성하는 새로운 골수를 이식 받음으로써 온몸의 피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혈액형이 다른 사람의 골수를 이식받으면 그 골수 공여자의 혈액형으로 혈액형이 바뀐다. 온몸을 도는 피가 달라지니 모든 장기가 그 새로운 피에 적응하고 맞춰져야 한다. 지금 내 몸속에 흐르는 피의 기능도, 성경에 나오는 인간으로 내려온 신인 예수가 사람들 대신 피 흘려 돌아가시고 사람들이 신인 예수의 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너무 익숙해서 일말의 궁금증조차 갖지 않고 살아왔는데, 정말 사람은 피로써 새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정욱인 이제 1차 전신항암과 척수항암을 마치고 호중구가 0이 되었다. 앞으로 암세포가 없는 상태가 유지되면서 회복이 되어야 한다. 이 전신항암을 3번 하는 동안 유전자가 맞는 조혈모세포를 찾으면, 이식 전처치라는 몸속 골수를 다 죽이는 최고강도 전심 항암과 방사선을 쐬고 이식 수술을 한다고 한다.
골수외 백혈병도 생겼다. 혀가 마비되고 복시가 생긴 건 뇌막에 간 암세포 때문이고, 폐에 물이 찬 건 폐에 간 암세포 때문이라고 한다. 백혈병에 걸리면 항암을 받지 않는 이상 피로 암세포가 전신으로 이동하는데 특히 뇌로 전이가 된 게 매우 안 좋아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대구에서 컨디션이 안 좋다고 했던 게 내가 내려갔던 추석 즈음이고, 사랑니를 빼고 피가 안 멈추고 몸이 너무 힘들다고 엄마를 부른 게 10월 말이었으니 오래전부터 몸이 안 좋았다. 세브란스에서도 피가 반 정도밖에 안 남아있고 백혈구가 10만대라고 했으니 연고도 없는 대구에 공부하러 가서 혼자 그 아픈 걸 어지간히도 참아냈나 보다.
정욱이는 오늘
"남들은 한 번이어서 시행과 착오를 겪느라 제대로 못 사는 인생을 두 번 갖게 되는 거니까 앞으로 하고 싶은 거만 하면서 살 거야"
라고 했다. 회사를 다닐 땐 출근 전에 운동을 하고 가고, 6개월, 1년에 한 번씩 성분 헌혈을 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동생이 치료과정에서도 본성같은 모범성을 발휘해서 의사가 하라는 그대로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정욱이인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정욱이는 어릴 때부터 정말 가족에게 그 어떤 걱정거리였던 적이 없다. 의연하지 못하고 의문과 불확실에 가득차있던 건 항상 나였다. 정말 하필 왜 정욱이에게 이 병이 온건가... 모르고 살아도 상관없었을 신앙의 깨우침 따위를 얻는데 정욱이가 쓰이게 만든 신이 너무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