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
엄마의 재테크 방식은 평범하면서도 특이하다. 돈 관리 철학이자 소신은 지극히 단순하다. 무조건 예금이 최고라는 주의다. 참고로 엄마는 아직(?)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통신비가 아깝다는 이유에서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폰뱅킹이 불가능하다. 집 근처 새마을금고와 신협, 우체국을 직접 찾아다니며 예금상품을 가입하고, 만기가 되면 만기 날짜에 맞춰 은행에 방문한 다음, 예금상품을 이어서 가입하신다.
예금이란 목돈을 은행에 짧게는 6개월, 보통은 1년 정도 맡겨두는 상품이다. 실은 내 돈을 맡기는 게 아니라 은행에 빌려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우리는 은행에게 내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만기일에 약속한 이자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은행에게 1년간 빌려주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어겨 미리 해지할 시에는 약속한 이자보다 훨씬 더 적은 이자를 받게 된다. 이래서 예금은 장단점이 분명하다. 원금 보장에 이자까지 받을 수 있는 굉장히 안전한 상품이지만, 내가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마음대로 꺼내어 쓰기 힘든 상품이다.
우리 부모님 돈을 비롯하여 나와 내 동생 돈까지 대부분 은행에 묶여있다. 이러니 집안에서 큰돈을 쓸 일이 생기면, 엄마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수많은 예금계좌의 만기일을 확인한 다음, 어느 시기가 되어야 어떤 어떤 예금이 만기되어 원했던 액수가 만들어지는지를 계산하신다. 돈을 안 쓰면 안 썼지, 예금을 해지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분이시다.
내가 처음 독립하여 자취를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엄마 머릿속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돈이었다.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 괜한 돈을 쓸 필요가 없는데, 뭣 하러 돈 아깝게 나가서 사냐는 것이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돈이 아까워 독립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내가 감내해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내 의지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부동산 어플을 활용해 회사 근처 원룸 시세를 알아봤다. 전세를 알아보니 적게는 4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이 넘는 집도 있었다. 분명 너무 비싼 집에서 살겠다고 그러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최저 가격의 전세 위주로 알아봤다. 어차피 독립하여 나가 사는 게 목적이지, 근사한 집에서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거 봐요. 그렇게 큰 집도 아니야. 8평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집이에요. 내가 지금 엄청 큰 집에서 살겠다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얼마 정도 하는데?”
“전세로 4천만 원 밖에 안 해요. 다른 곳은 1억이 넘어. 솔직히 1억까지는 좀 무리고. 4천만 원 정도만 딱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럼 그 4천만 원은 어디에 있는데?”
엄마의 말씀에 순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어디 있긴! 엄마가 내 돈 다 가져가서 은행에 넣어두었잖아요! 그동안 내가 일하면서 꼬박 꼬박 드렸잖아요. 그럼 그동안 많이 모아졌을 거 아냐. 설마 그 돈이 4천만 원이 안 될까? 그 돈으로 쓰면 되지.”
독립하여 자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돈은 전적으로 엄마가 관리하였다. 내 주거래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면 매달 일정 금액을 엄마가 알려준 계좌로 이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엄마는 그 돈을 가지고 따로 모아두기도 하고, 돈이 좀 모이면 직접 은행을 찾아다니며 예금 상품을 가입하셨다. 그럼 나는 그 나머지 돈으로 한 달을 생활하였다. 엄마에게 맡긴 돈이 어디에 가입되어 있고, 어느 정도 모여 있는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 돈 다 예금에 가입되어 있어. 그거 해지하면 이자 못 받아. 그러면 그동안 허송세월한 거야.”
어느 정도 예상했다. 예금 해지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분이니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혹시 몰라 미리 월세도 알아봤다.
“그럼 이 집 봐요. 여기는 전세가 아니고 월세야.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0만원. 거기에 관리비는 3만원이에요. 그러니까 보증금 200은 이번 달 받은 인센티브로 해결하고, 앞으로 내 월급에서 매달 23만 원 정도는 내가 감당할게요. 지금 은행에 있는 돈 하나도 안 건드리고, 내 월급으로 살아볼게.”
엄마는 며칠 더 고민해보겠다고 하셨고, 결국 월세로 집을 구하는 걸 허락하셨다.
‘전세는 안 되고 월세는 된다고?’
어느 곳이 금리가 더 높은지, 소수점까지 따지시는 분께서 전세가 월세보다 손해라는 걸 모르실 리가 없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분명 전세보다 월세가 더 손해다. 내가 월세로 방 계약했다고 말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왜 전세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가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든 독립하여 집을 구해야 했으니까.
나는 의아한 마음을 뒤로 숨긴 채, 기쁜 마음으로 원룸을 계약하였다.
그러고 몇 년 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세계 경제가 혼돈에 빠지면서, 미국 금리가 정말 미친 듯이 치솟았다. 덩달아 우리나라 대출 금리도 무섭게 올랐다. 그러다보니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었고, 그 이전에 갭 투자했던 임대인들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로 인하여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속출하였고, 안타깝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가까운 내 회사 동기도 6천만 원 전세사기를 당해 괴로워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전세 제도가 낳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분명 가슴 아픈 일지만, 어쩌다보니 나는 위험구역에서 저 멀리 벗어나있었다. 전세가 아닌 월세로 살고 있었고, 예금을 해지하지 않았으니 높은 예금금리 덕분에 꽤나 괜찮은 이자를 받고 있었다.
물론, 엄마가 몇 년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전세를 반대하고 월세를 찬성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상하게 볼 수 있는 한 사람의 곧은 신념이 때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운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