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문 앞에서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트루먼 쇼」는 작은 항구도시 씨헤이븐(Sea heaven)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곳에서 트루먼은 지극히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가짜였다. 그의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연기자였고, 그의 인생도 치밀하게 짜인 연출에 의해 흘러온 거짓된 삶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트루먼은 폭풍우를 뚫고 세상의 끝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씨헤이븐 세트장의 거대한 벽이 있었고, 진짜 세트장 밖으로 나가는 문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루먼이 그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탈출하면서 트루먼 쇼는 끝이 난다.
“현상아~ 같이 과일 먹게 거실 밖으로 나와.”
“현상아~ 이제 텔레비전 그만 보고 방 안에 들어가서 숙제해.”
집 구조를 살펴보면 하나의 거실과 여러 개의 방으로 되어 있다. 거실은 가족 모두가 이용하는 넓은 공간이라는 인식 때문에 “거실 밖”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다. 반면, 방은 개인이 이용하는 좁은 공간이라는 인식 때문에 “방 안”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다.
영화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거실 밖과 방 안 이야기로 빠져버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방 문이 트루먼이 세상 끝에서 마주한 문이라는 것이다.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실이 오히려 세상의 안이고, 부모로부터 멀어져 자신만의 세상을 펼칠 수 있는 방이 오히려 세상의 밖이라는 점이다.
물론, 방 문이 아니라 아예 집 문을 열고 진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건이 여의치 않다면, 방 문을 열고 온전히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세트장 문을 열고 씨헤이븐을 벗어나는 트루먼과 같은 마음가짐이라고 난 생각한다.
아이가 성장하여 청소년기를 맞이하면 홀로 방안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거실에서 부모와 함께 과일을 먹으며 텔레비전 보는 시간이 즐겁지 않다. 혼자 방 안에 있고 싶다. 방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간 아이를 보며 부모는 내심 서운함을 느끼고, 방 안에서 저 녀석이 혼자 뭐하고 있나 의심도 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집에 들어온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하고, 아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모가 다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이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고, 부모가 짜놓은 틀 안에 자녀가 있어야 하며, 그 자체가 아이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트루먼 쇼 제작자의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인 셈이다.
좋게 말해서는 부모의 보호 아래, 나쁘게 말해서는 부모의 감시 아래, 거실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은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 예상 가능한 일만 벌어지며, 특별히 생각하거나 고민할 일이 없다. 모르면 부모한테 물어보면 되고, 어려우면 부모한테 부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홀로 방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방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본인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스스로 고민하고 혼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갈피를 못 찾고 홀로 방황하는 시간 역시 허용된다.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좀 더 고민하고 답을 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 역시 본인의 선택이기에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도를 펼치고 내가 지금 있는 곳과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곳을 찾는 과정까지 여행의 한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께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을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침묵의 바다에 들어가 벌거벗은 자신을 마주하고, 그 시간 동안 진정한 고독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시나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어야 창작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법정 스님과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종합했을 때, 홀로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아이의 성장은 부모가 지켜보고 있는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떨어진 방에서 이루어진다.
난 꿈꾸며 살 거야
세상의 문 앞에서 쓰러지진 않아
내 눈감는 날에 내 노래 들으면서
후횐 없을 거야 내가 택한 길은 영원한 걸
전람회 김동률과 신해철이 함께 부른 [세상의 문 앞에서]의 일부 노랫말이다. 세상의 문 앞에 서있는 이의 마음가짐이 느껴지는 곡이다. 꿈을 꾸며 살기 위해 문 앞에 섰고, 문을 통과하는 것이 후회 없는 선택이며, 내가 택한 길이기에 이 길을 영원할 거라 말한다. 비록 세트장이었지만 세상 끝에 서있었던 트루먼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대는 문을 열고 거실로 향할 것인가 방으로 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