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집에 있었는데
“주말에 뭐 했어?”
“집에 있었는데.”
“토요일, 일요일 둘 다?”
“응.”
“주말 내내 집에서 뭐 했는데?”
“그냥 집에 있었는데.”
집돌이, 집순이에게는 이상한 대화도 아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하여 집 밖은 고사하고 침대 위에서도 내려오지 않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집돌이 인가?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주말에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집에만 있기는 좀 그러니 산책도 다녀오는 편이고, 때로는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도 보낸다. 그렇다고 해서 주말 내내 집에만 있는 걸 힘들어하거나 지루해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면 집돌이가 맞는 것 같기도 하구...)
우리 모두가 집돌이, 집순이로 살 필요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나만의 공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족 여럿이 함께 사는 집일지라도 나만의 공간은 필요하다. 그 공간이 독립된 방이라면 가장 좋고, 방이 어렵다면 여자들의 화장대처럼 개인 책상 정도는 확보해야 한다. 나만의 공간 부재는 내 존재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는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를 통해 한국 남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역할을 떨어내고 차분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배후 공간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자아(自我)’를 무대 위의 연기자에 비유한 미국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이야기를 예로 든다. 어빙 고프먼은 우리에게는 일관되고 통일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어진 상황에 따라 여러 자아가 제각기 다르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고프먼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인간에게는 ‘여러 자아’가 제각기 다르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때 무대 위의 여러 자아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상대화할 수 있는 무대 뒤의 공간이 필수적이다. 즉, 분장을 하고 분장을 지우는 ‘배후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김정운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36쪽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은 아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 모습과 무대 아래에서 보이는 배우 모습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연기를 마친 배우는 분장실로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다시 진짜 내 모습으로 돌아간다. 무대 뒤 공간인 분장실은 배우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남들과 거리를 두고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는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를 통해 독립된 공간의 필요성과 역할과 의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작가는 우리말에는 없지만 독일에는 존재하는 단어인 ‘슈필라움’에 집중한다. 개념이 없다면 그 개념에 해당하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개념을 설명할 수 없다. 독일과는 달리 심리적 여유 공간이 부재한 대한민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작가 본인 스스로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쟁취해나가는 과정을 책 속에 담았다.
심리학자의 눈에는 ‘슈필라움(Spielraum)’이라는 단어가 아주 특별하다. 흥미롭게도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이 단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김정운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6쪽
작가는 물리적 공간이 확보되었을 때, 심리적 공간까지 확보되며, 자기만의 공간이야말로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라 말한다. 반드시 내 집 마련으로 얻은 크고 좋고 비싼 공간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작은 공간이라도 괜찮다. 작은 공간이라도 그 안에서 하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나만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공간이 바로 진정한 ‘슈필라움’이라고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는 말한다.
월세 27만원 밖에 내지 않는 작은 원룸이지만, 내가 독립하여 지내는 이 공간은 내게 무척 특별하다. 나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평일 하루를 되돌아봤을 때,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과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을 빼면 지극히 짧은 시간을 내 집에서 보낸다. 퇴근 후 밥 먹고, 설거지하고, 영어 공부 좀 하고, 유튜브 좀 보고, 운동 좀 하고, 글 좀 쓰고, 책 좀 보고 잠드는 게 내 일상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이야말로 진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주말에는 그 짧은 시간이 대폭 확장되어 내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에 더욱더 소중하다.
오늘도 이스턴사이드킥의 [쉬는 날 방안]을 들으며, 이렇게 글 한편 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