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엄마, 아빠의 금쪽이
나의 새로운 사춘기가 도래한 것 같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가 시키면 더 싫다. 공부하려고 앉았는데 뒤에서 공부하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책을 덮어버리는 식의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본가에 가는 빈도수가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게 요새 미운 서른하나를 보내고 있는 나의 나날들이다.
한 달 전쯤의 저녁이었다. 거실에서 대화하는 부모님의 이야기에 진절머리가 나서 무작정 옷을 입고 인사는 한 뒤 자취방으로 왔다. 그날 오후에는 설날 시골에 언제 갈지 대화를 하다가, 친척언니가 하루 일찍 와서 이모 생일파티를 하자고 한 게 떠올라 아빠에게 전했더니 반응이 시큰둥해서 그럼 난 알아서 먼저 내려가겠다는 대화를 했었다. 근데 이때의 대화가 화근이었는지 엄마한테 이르듯 ㅇㅇ이가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 집을 무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며 2절에 3절에 4절까지 듣다가 내가 굳이 이걸 들어야 하나 싶어서 짐을 챙겨서 나왔다. 몸도 좋지 않아서 혼자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자리를 뜨고 싶었던 게 더 컸다. 와~ 해도 해도 자식새끼 뒷담은 아니지 않나? 하는 마음과 내가 그동안 부모님을 위해 꾹 참고 했던 모든 것들이 생각나면서 주체가 안 되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부모님께 이런 감정이 드는 게 처음이라 나조차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끼면서 자식과 부모는 떨어져 있는 게 맞다는 단순한 결론을 냈다. 그래도 다음날 내가 이런 일로 기분이 상했다고 말을 하면서 다음부터는 뒤에서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그때그때 서운한 게 있음 말해달라 했고, 아빠의 입장도 들으면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남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 후, 아빠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명절에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친척언니가 이모 생일파티를 한다고 하니 하루 일찍 출발하려고 한다고 말했고 아빠는 그러지 말고 다음날에 출발하자는 거다. 기름값도 아끼고 같이 출발하자는 건데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서 시골 내려가 명절 보내고 다시 인천와서 서울까지 가라는 게 대체 어떤 기름값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고, 이모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는 나의 말은 듣지도 않길래 나는 그냥 전에 말했던 대로 따로 가겠다고 하니 아빠가 우선 생각해 보라며 끊었다. 곧이어 엄마에게 전화가 왔는데 나보고 고집 좀 죽이라길래 난 생각했다. 이게 지금 연장전이 됐구나. 나만 끝났다고 느꼈구나...
결국 약간 토라진 아빠를 뒤로하고 이모의 생일파티를 위해 금요일에 엄마를 픽업해서 시골에 갔다. 엄마는 차 안에서 내내 아빠와 내 욕을 했지만 차라리 앞담이 낫지 싶어 음악소리만 키웠다. 어릴 때 꽤나 강압적이었던 아빠의 독재정치에 신물이 난 나는 성인이 된 후 누가 뭐 하자, 뭐 해라는 등의 강요의 뉘앙스를 풍기면 이상하게 무기력해지고 반골기가 돌면서 눈깔이 뒤집혔다. 그 뒤로 생긴 말버릇이 강압이나 강요에는 무조건 싫다고 말하게 되었고, 성격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같이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하라고 하는데, 들으면서 이론으로는 네 말이 맞지 하다가 이론을 적용하려고 부모님과 대화만 시작하면 피가 멈추는 기분이다. 뭐든 함께 하고 싶은 부모님과 이제는 좀 혼자 보내고 싶은 나의 우당탕탕 좌충우돌 싸움 스토리가 시작된 것 같아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다툼으로 생길 감정소모가 벌써 지치기도 하다. 그동안 내가 너무 잘했던 탓일까? 유독 삼 남매 중 내게 기대하는 게 많은 것 같아 올해는 그 기대를 좀 저버리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가족은 떨어져 있을 때 가장 애틋하다는 명언을 새기면서 곧 있을 아빠 생신잔치로 본가에 내려가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