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화래진 Apr 15. 2020

강요의 시간

 누구 때문에 무슨 일을 하고 있다면 멈추고 돌아서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 일이 천직이라 잘 해내겠지만 대부분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한 번쯤은 멈추게 되니깐. 




 공부가 싫었고 대학에도 미련이 없었지만 공부를 못하지는 않고 가고 싶었던 과가 있어서 몇 군데를 넣었다. 하지만 최저를 맞추지 못했고 나는 좌절했다. 재수하겠냐는 부모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는 내 원서접수 내역이 나타났다. 아빠가 다른 학교의 건축과를 잔뜩 넣어놓고 나에게 여기라도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결국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하게 생겼구나. 학교 생활은 하고 싶어 냉큼 잡았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부터 강요를 참 많이 당했다. 여자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법에도 없는 행동 방침부터 수학을 미치도록 싫어했지만 이과에 가라는 말까지.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체력도 좋았고 똑똑했을 텐데 왜 한 번을 거역하지 못했을까. 대학에 가서도 설계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전부의 이유는 아빠와 함께 종합건설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목적에 있었다. 반감이 일었고 뭐든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졸업도 하기 전에 구조설계로 들어가 엔지니어가 되었다. 아빠는 잘 모르는 분야였고 그때부터 자유였다. 하지만 일이 힘들 때마다 자꾸 누군가를 탓하게 되었고 3년 차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일에 자꾸 누군가가 개입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고 싶은 일을 본격적으로 찾기로 했다. 그전에 모든 명령들을 거역해야 했다. 어차피 내 말을 안들을 테니까 최후통첩만 날리고 나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했다. 이미 학교에 과까지 그의 입김이 서려있어 안심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나를 신경 안 쓰는 척했다. 그 후 미친것처럼 여행을 다녔다. 캐나다, 중국, 일본, 등등 그동안 바빠서 쓰지도 못한 돈을 전부 바쳐 비행만 하면 잠들 정도로 비행기랑 친해졌다. 갔다 온 나는 새로운 일을 하자니 너무 늦은 것 같고, 귀찮고 이 전 일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다시 돌아갔다. 



 다시 돌아간 나는 미쳐버리고 말았다. 나이는 스물 후반을 달려가는데 일에 애정이 없으니 깊이가 생기지 않았다. 발전도 더뎠고 누군가의 부속품처럼 대체될까 매일매일 전전긍긍했다. 일의 목적도 나의 목표도 없이 매일 남들처럼 그렇게 살았다. 나를 좀먹는 것 같다가도 출근하는 버스에서 다들 나와 같은 얼굴로 버스카드를 찍는 걸 보면서 나도 그냥 남들처럼 살고 있는 거였구나. 나만 이렇게 무기력한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으로 매일의 나를 위로했다. 매주 화실에 가서 온갖 색으로 붓질할 때는 해가 지고 달이 뜨는지도 모르면서 왜 회사에서는 1분, 2분도 시간이 애가 타게 가는지. 남들처럼 사는 게 옳게 사는 것도 아닌데 뭣하러 꾸역꾸역 그 틈에 들어가 버스카드를 찍었는지. 내가 좋아하면서 즐길 수 있는 일을 물색했다. 그리고 두 번째 회사에서도 사표를 던졌다. 




 학원을 등록했다. 내가 원하는 곳에 들어가려면 포트폴리오가 필요했다.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강요로부터 도망쳤다. 무조건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이 나 자신을 옥죄였다. 이제는 내게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서부터 옥죄여져있던 나 자신이 안정된 길을 가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쉽게 가자고 말한다. 결정하지 못하고 온전히 나를 생각하니 나는 이 분야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다. 그 뒤에 내가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 일하고 싶다. 누구나 들어와도 상관없는 자리가 아니라 나라서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얻고 싶다. 


 누가 시키는 일을 할 때에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은 내가 받아들였다는, 그것 또한 내 선택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도피성 선택을 하게 된다면 내 인생에서 의미 없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가 아닌 스스로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누군가가 돌리는 쳇바퀴의 부속품처럼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일은 언제나 귀찮고 해야 할 일이 지금보다는 많기 때문에.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구조 설계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