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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화래진 Feb 22. 2021

나의 불안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가

너? 나? 아님 우리?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내 꿈이 보육원을 차리는 거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원한다. 행복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고 다들 그러길 바란다. 행복한 어린이들이 행복한 어른이 되었을 때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이나 부정적인 감정들을 덜 경험할 것 같다는 막연하면서도 확신에 찬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날것의 그대로를 보는 느낌이라 매번 신선하고, 과거의 내가 떠오르고 어제의 조카들이 떠오른다. 특히 요새 빠져있는 프로그램은 '금쪽같은 내 새끼'이다. 패널 중 오은영 박사님이 있다. 나는 이분이 너무 신기하다. 단호하지만 부드럽고 마음속에 아이가 한 명 살고 있는 것 같다. 표현에 한계가 있는 아이들의 행동 언어까지 분석해 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눈물이 흐르니 말이다. 


 그중 최근 본 화인 28화 쓰레기를 주워오는 금쪽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쓰레기와는 별개로 엄마와 한시도 떨어지기 힘들어하고 엄마의 거절을 받으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말하는 아이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괜히 태어났다', '태어나지 말걸 그랬다' 등의 말들을 오열 뒤에 연발하면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찢어질 엄마의 심정에 이입했다. 아무래도 나는 미혼이고, 아이가 없다 보니 대부분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그날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VCR을 전부 본 박사님은 금쪽이 어머니가 작은 거에도 놀라고 반응하시는 걸 보고 화면을 멈춘 뒤 물었다. 불안함을 많이 느낀다는 말 뒤로 아이의 엄마는 상담을 다니고 있다고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일들에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기가 빨리는 유형이었고, 집으로 돌아와서 항상 '하, 힘들어.', '하, 기빨려.' 등을 말했다고 한다. 아이는 그런 엄마를 지켜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인식했고, 약한 엄마가 눈 앞에서 사라지면 다치거나 죽을까 봐 늘 불안에 시달렸다. 나뭇가지들을 주워와 선물이라고 하는 것 또한 엄마를 지켜주는 일종의 엑스칼리버였던 셈이다.


 불안한 엄마와 불안한 금쪽이 그리고 불안한 나.

불안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 궁금해졌다. 금쪽이 엄마의 불안이 있었고 금쪽이의 불안은 엄마였다. 그렇다면 나의 불안은 무엇일까. 




 작년부터 외로움을 동반한 불안을 느끼는 빈도가 잦아졌다.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오랜 친구들과 대화하는 건 즐거웠다. 그런데 요새는 대화가 쉽지 않다. 대화의 방법이라는 것에 대수롭지 않다 느꼈는데 친구와의 대화로 생각해보는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만난 친구가 내게 말하길 나와 대화하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8시간 이상을 말만 하고 헤어지면서도 이상하게 항상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느꼈는데 상대도 그런 말을 하니 너무 좋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친구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생각보다 대화방법을 인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의식에 튀어나온 습관으로 좋은 대화가 어려울 때도 있다고 했다. 좋은 대화라는 게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할 따름이었다. 좋은 대화란 기본적인 예절이 있는 대화였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면 이야기하는 것, 혹시 끊기더라도 다시 되물을 줄 아는 것, 공감은 하되 이야기를 뺏지 않는 것 등에 대해 들었다. 


얼핏 봐도 좋은 대화가 아닌 듯하다.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사실은 배워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대화 후에는 항상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는지, 이 대화가 즐겁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모든 비언어와 언어의 요소를 통틀어 상대의 배려 없는 대화 습관에 말할 의욕이 그치게 됐기 때문이다. 말하는 순간이 줄어들고 1대 1로 보는 요즘, 대화의 양이나 보내는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이지만 즐겁게 보내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이 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모든 시간이 즐거우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 오히려 마음이 공허해져서는 끝내 불안해지는.


 나는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 배려받는 대화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아버렸으므로 나부터 좋은 대화 습관을 가져보려고 한다. 우리는 친하다는 이유로 상대와의 대화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맞은편에 두고 핸드폰으로 다른 이와 연락을 한다던가 대화 도중 맥락 없는 에피소드를 마구 이야기하고, 경청하는 척 하지만 결국 본인 이야기를 한다. 이와 같은 대화의 결말은 뇌에서 집에 가자고 소리를 치면 그제야 끝이 난다. 집에 오는 길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항상 의아하고, 똥 싸고 안 닦은 것처럼 찝찝하고 불안했지만 이제 그 원인을 알아냈으니 됐다. 다음 무례한 대화에 대한 나의 액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불안의 원인을 찾은 것에서 만족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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