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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Feb 06. 2024

'딸'을 원하는 당신이 망각하고 있는 것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때 난 걱정스러웠다.


아, 이 아이도 나만큼이나 피곤한 세상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 근처 마트로 임산부 요가 클래스를 다니던 시절, 이제 막 안정기에 들어선 산모들은 서로 몇 주쯤 됐는지, 아이의 성별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으로 어색하게 안면을 텄다.


클래스에서 마음맞는 몇몇끼리 뭉친 소모임 멤버 중 신기하게도 유일하게 나만 딸이었는데, 산모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딸이라니, 너무 부럽다.
아들은 키워서 남 주는 거고,
나이 들면 딸이 최고의 친구라던데...
실은 나도 딸을 원했어.


내 아이가 유일하게 '딸'이라서 부럽다고들 입을 모으는데, 나는 그 말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들은 '딸'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을걸까 되려 궁금해졌다.


어린시절 엄마는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했어.
네가 힘든 엄마한테 힘이 돼야지.


그리고 내가 장학금을 타거나,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엄마 선물을 사 가면 엄마는 말했다.

'역시 딸이 최고'라고.

내게도 그런 말을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매번 허락되는 말은 아니었고, 늘 엄마에게 나의 필요가치를 증명했을 때 들을 수 있는 보상 같은 것이었다.

한때는 그 말이 너무 고팠다.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딸로서의 내 쓸모를


대개의 딸들이 공감능력이 높다는 이유로

엄마들은 속마음을 털어놓곤 한다.

마치 딸은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주변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한탄 혹은 넋두리..

아들한테는 못 할말을 너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다는

그 말이 한때는 훈장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더랬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알았다.

부모라면 응당 사랑을 주어야 하고,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이는 부모의 감정쓰레기통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 부모에게 커다란 신비와 사랑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는데,

어째서 부모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와 삶의 무게를 나누어 지길 벌써부터 기대하는 것일까.

어째서 딸에게는 이토록 관용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일까.

딸이 애교가 있어서 좋다. 나이들수록 챙겨주는 건 딸이 최고다. 잘 키운 딸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

이런 류의 말은 은연중 딸들의 무의식에 자리잡게 되고, 대부분의 딸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이거나,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둘 중 하나를 가슴에 얹고 살아간다.


반대로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라거나 '출가외인'과 같은 표현은 결혼 한 딸을 가정 바깥의 인물로 내몰기도 한다. 

딸이란 부모의 입맛에 따라 말 한마디로 원가정에 종속되거나 퇴출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걸까. 

그 시선이 너무 서늘하고 가혹해 문득 '딸'의 입장에 선 나는 서러워진다. 


이젠 다 고리타분한 옛말이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임신했던 2017년도에 만난 산모들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했고, 현재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들려오는걸 보니 애석하게도 지금이라고 크게 인식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아들을 키워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의 딸의 경우 아이다운 애교가 있고, 눈치가 빨라서 여우처럼 엄마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하거나, 다큰 어른처럼 마음을 도닥여줄 때도 있다.


하지만 아들이라고 그러한 면모가 전혀 없을까. 또 애교없이 시크한 딸이면 또 어떤가.

아이들이 부모가 바라는 성격대로 자라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성격이 아들, 딸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세상이 정해놓은 관용적인 딸의 이미지에 부합하기위해 부다뇌 노력하며 살아온 지난 시간이 괴로웠기에 나는 뱃속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차라리 '아들'이길 바랐다. 아들에게 무언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딸에게 당연하단듯 주어지는 기대의 무게를 굳이 지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며칠 전 SNS 상에서 이런 글을 봤다.

눈을 의심했고, 불쾌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여자

병원에 두 여자가 들어옴

시엄니인지 친정엄니인지 모르겠으나

아픈 부모 또는 시부모 모시고 병원에 오는 여자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더라.


이상 불효자 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자식은 그 누구든 칭찬받아 마땅할 터다.

하지만 그 광경을 굳이 '예쁜여자'로 묘사하고, 자신도 좋은 아들이 되어야 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여자'를 마치 추켜세우는 듯 하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꼴이라니..

그리고 자신을 '불효자'로 깎아내리면서 책임으로부터 한발 더 멀어지는 비겁함이 함축된 글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내 또래의 엄마들도 자신의 노후와 함께 할 '딸'에 대한 기대가 막중한데,

중년 남성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가? 싶은 자조가 나오는 글이었다.


나는 내 딸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나이 들고, 지금보다 몸이 노쇠해져서 힘이 없어지면 젊은 딸에게 기대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몸과 마음, 경제적인 체계를 지금부터 준비하려 노력하고 있다.


딸을 원하는 당신이 망각하고 있는 것

자식은, 특히 내게 '딸'은 전당포마냥 담보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딸은 예쁜 리본과 원피스를 입혀 방긋방긋 웃는 꼭두각시마냥 키우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앞서 스몰토크에서 산모들이 무심코 했던 '딸은 살림밑천, 나이들면 딸이 최고'이라는 말이

그냥 으레 가볍게 다들 하는 말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아무리 그들이 딸이 부럽다고 한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만큼 소중할까.


하지만 말에는 힘이 있다.

그러한 말을 듣고 자란 딸은 뜻모를 부담감에,

반대로 아들은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 앞에 무력감을 느낄수도 있다.


당신의 자녀들은 항상 당신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기를..

생각보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내가 경험으로 체득했기에

나는 모든 언행이 유난스러우리만큼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부모로서 부족한 부분이야 수도 없이 많겠지만,

자각할 수 있는 부분이라도 신경쓰면서 아이를 키우면

우리보다는 조금 더 당당하고, 가뿐한 딸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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