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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Sep 23. 2015

24시간의 버스 이동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150626-27 : 베트남 후에-호치민, 버스 안

 후에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뒤, 우리는 48만 동을 주고 호찌민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만 했지만, 처음에는 두 번인 줄 알았다. 덕분에 세  번째 갈아탈 때에는 고생을 해야만 했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내려와 호텔 로비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출발시간이 다행히 그리 늦지  않아한 시간 가량을 앉아있었던 것 같다.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싶을  때쯤 우리를 버스로 픽업해가는 차량이 도착하여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로 향했다. 첫 번째 버스에서 우린 각자 맨 뒷자리의 위층과 아래층에 나뉘어 탑승했다. 위층은 비교적 시원하였으나 아래층은 그렇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좁은 것은 매한가지여서, 맨 뒷자리는 좋지 못한 것이라고 우린 결론지었다. 다음 번 버스에서는 앞쪽의 독좌석을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 낮에 출발한 버스는 하노이에서 어두워질 무렵 탔던 버스보다 (분위기가) 평안했다. 창가 쪽에 앉은 나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가져간 책을 읽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옆자리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커플 한쌍이 앉았는데, 여자가 내 옆에 앉자 남자가 표정을 구기며 여자와 내 사이에 들어왔다. 덩치가 큰 남자여서 조금 짜증이 났지만 남자의 포즈가 아주 겸손하여 곧 나아졌다. 


 24시간의 버스 이동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베트남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기린들처럼, 전설 속의 동물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가 탄 버스는 현실의 시간 속을 조용히 미끄러져갔다. 창 밖으로는 때때로 논과 밭, 산과 강, 소와 물소가 번갈아 지나갔다. 마을에서는 작은 집들이 연속되어 스쳐갔는데, 계속해서 관찰하니 이곳의 집들에는 일종의 프로토타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프런트가 있는 전면이 높고 배면이 낮은 좁고 깊은 집이 주변 농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대부분 집은 장방형의 평면 중간 즈음에 보조현관을 따로 두고 있었다. 거대한 저택의 경우엔 예외였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니 저녁이 되었다. 우리는 두 번째 휴식시간에 차에서 내려 휴게소에서 간단한 밤밥을 먹었다. 국수와 고기덮밥을 간단히 먹으니 든든해졌다. 밤에는 전등을 켤 수가 없어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맨 뒷자리는 옆자리에 바로 사람이 있어 핸드폰의 불빛이 방해될까 폰조차 열어볼 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잠이나 자는  수밖에. 


 득의 첫 버스에서 동행한 옆자리 친구는 팔다리에 붕대를 감은 영국인이었다. 나중에 웬디라고 이름을 밝힌 그 청년은 발리와 태국을 거쳐 베트남까지 네 달 동안 바이크를 타고 여행 중이었다 했는데, 최근 바이크의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아 크게 중상을 입었다 했다. 바로 전날 후에의 밤거리를 신나게 달렸던 우리는 살짝 후 달렸다. 득의 두 번째 버스에서 동행한 친구들은 이스라엘에서 온 한 커플이었다. 득의 옆자리에서 물고 빨고 난리를 피웠다던 그 친구들은 서로의 전역 기념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남자는 5년, 여자는 2년을 군대에서 보냈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남녀는 우리나라의 남녀보다 더 서로를 많이 이해할까? 커플 전역 기념 여행이라니, 수능 끝낸 기념 여행처럼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마지막 버스로 옮겨 탈 무렵, 종종 바다가 보이더니 곧 내내 해안가를 달렸다. 아름다운 해안 마을과 보트들이 정박한 포구가 지나갔다. 절벽과 파도가 만나는 자리마다 하얀 포말이 생겼다 사라졌다 했다. 그러나 낭만적인 풍경들에 비해 우리의 버스 여정은 그리 낭만적이지 못했다. 두 번째 버스에서 우리의 버스 영수증을 반납한 우리에게 세 번째 버스의 정거장에서 티켓을 요구한 것이다. 주변을 보니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꽤나 있는  듯하였다. 난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호텔번호가 가이드북에 있었던 곳이 생각났다. 가이드북을 들고 가 구글호텔에 전화해서 확인해보라고 하니 저들끼리 뭐라고 하다가 곧 영수증을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세 번째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가는 중, 한 공익광고 비슷한 거대한 간판을 봤다. 한 가정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있고 어머니는 밥을 짓고 있으며 딸아이는 자신의 성적표를 들고 어머니에게 자랑하고 있는 풍경이었다. 아이의 시험지에는 10점이라는 점수가 적혀있었다. 가족은 화목하고 행복해 보였다. 10점이 만점일 것이라는 생각 대신, 베트남에서는 딸아이가 꼴등을 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공익광고구나, 하고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즉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29시간 만에 우린 비가 그친 호찌민의 밤거리를 밟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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