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고래 Oct 24. 2015

그중에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150603(3) :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왓 바욘사원

 다리 끝에 세워진 남문은 높이가 20미터는 돼 보였다. 크레테 유적 중 사자의 문이던가? 아치는 아니고 아치의 시원처럼 여겨지는 계단식의 천장 구조법이 여기에도 쓰였다. 층층이 올려 쌓은 두꺼운 돌들이 문의 상부에서 계단처럼 모여 천장을 만들고 있었다. 문의 좌우에는 각각 두 마리 씩의 코끼리가 코로 땅을 버티고 서 있었으며, 아치 위에는 동서남북에 머리가 하나씩 달린 사면상이 올라가 있었다. 사면상의 네 얼굴은 모두 눈을 뜨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이 위대한 도시로 들어가려는 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면상은 통치자로서의 권위와 통제력을 과시하려는 의미일까. 13세기에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한 시민의 머릿속에서는 이 거대한 도시가 온전히 이해될 수 있었을까.


 성벽으로 둘러싸인 유적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높은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고 있고 그 가운데로 곧게 뻗은 도로가 다시 길을 달렸다. 이 도시에서 돌로 지어질 수 있었던 건물은 왕과 신에 관련된 건물들 뿐이었으므로, 이 공간들을 빽빽이 채웠던 수 많은 백성들의 목조건축물들은 시간이 삼켜 없애버린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키워낸 수 많은 나무와 풀, 벌레, 그리고 원숭이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달리니 바욘Bayon사원이 나타났다. 도시의 정 중앙에 자리한 이 사원은 돌로 지은 종교 건축물 중 가장 인상적인 건축이라 하기에 틀림없었다. 중앙에 높이 솟은 탑을 중심으로 수 많은 사면상들이 정확한 대칭과 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동서남북에 자리한 문을 통해 들어가면 한 단씩 높아지며 사면상의 문들을 거쳐 중앙의 탑으로 향하게 된다. 


 이 유적에는 총 216개의 얼굴이 있다고 했다. 216개의 얼굴이 저마다 약간씩 표정이 다르고 개성이 있다고. 이곳을 천천히 오르는 동안 수 많은 얼굴들이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비스듬한 얼굴이, 아래로 내려보는 얼굴이, 눈을 슬며시 감으려는 듯한 얼굴이. 216이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숫자의 얼굴이라면 인간의 감정이라던지, 표정이라던지 하는 것들을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크메르인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만났던,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한 사람의 얼굴에서도 적어도 216개의 얼굴보다 더 많은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비 내리던 밤의 호숫가에서 우비를 입고 나를 올려다보던 그 얼굴과 어느 날 밤 문득 울음을 터뜨리던 얼굴, 차갑고 매섭게 내게 소리를 지르던 얼굴과, 무릎 위에 나를 뉘어놓고 나긋이 책을 읽어주던 그 평온한 얼굴까지.


 그 수 많은 순간들의 얼굴들이 탁류처럼 나를 일시에 덮쳐오니 약간 어지러웠다. 어쨌든 크메르인들 상상한 그 얼굴들엔 내 기억 속의 얼굴은 없었다. 이곳을 설계한 누군가는 누구를 떠올리며 216개의 얼굴을 조각했던 걸까. 적어도  그중에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종 빨간색 꽃을 피운 나무들이 지나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