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소가레루? 먹는 건가요 그거?
1. 타소가레루?
타에코는 밝혀지지 않는 이유로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녀의 종착지는 어느 남쪽 섬. 뭣 때문에 도망쳐온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여행지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를테면 관광, 방해 없는 휴식,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같은 것들.
그러나 그녀가 도망쳐온 곳은 평범한 곳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묵는 숙소의 주인장은 매 끼니마다 그녀에게 함께 식사하자며 귀찮게 굴고, 어느새 나타난 의문의 중년 여성은 아침마다 그녀의 방에 찾아와 모닝 알람을 날린다. 심지어 그녀가 주변의 관광지를 묻자 여긴 그런 거 없다며, 여긴 '타소가레루' 하러 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한다. 타소가레루? 타에코는 되묻는다.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그거?
타소가레루는 나중에 찾아보니 황혼이 들다, 황혼이 지다 뭐 이런 뜻에서 유래한 말로, 그 시간쯤 되면 사람들의 인상이 시각적으로 잘 인식이 안되니까 저게 누군지 곰곰이 생각해본다는 점에서 '생각하다' '사색하다' 등으로 변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해 질 무렵 바닷가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혹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모양새로 주저앉아 뭔가를 생각하는 사람을 본다면 타소가레루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또한 여행 갔던 곳 중 무언갈 보거나 뭔갈 먹거나 하려는 목적으로 가지 않았던 곳이 있다. 그러나 타소가레루 하려고 간 건 아니고, 돈이 없어서 농장에 갔던 일이다. 독일에 있을 때였는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노숙을 하다가 은인의 손에 거두어진 이후, 그 은인이 좀 불편해하는 것 같아 농장주에게 연락을 돌려 가장 먼저 호의적인 답신을 보내온 농장주에게 찾아간 것이다. 그것은 분명 관광의 목적도 아니고, 미식의 목적도 아니고, 쇼핑의 목적도 아닌, 그러니까 여행 아닌 이상한 여행이었다.
거기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농사를 지었다. 매일 아침 6시, 혹은 7시에 일어나 광활한 밭에 나가면 수확을 기다리는 수많은 채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거대한 가지와 통통히 살이 오른 오이는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수확해야 할 대상이었고, 때로 샐러리와 베리, 양파나 대파 같은 것들을 뽑았다. 아침에 잘라낸 샐러리의 밑동에서는 흰색의 점액이 흘렀다. 그 점액을 보면 우리의 담당자 마리오는 항상 만족했다.
일은 보통 12시면 끝났다. 나는 일과 후에 주로 방에서 책을 읽었다. 봤던 책을 또 읽고, 핸드폰에 저장된 만화를 또 보고, 때로 농장의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주변을 달렸다. 먼 산 밑자락에 고즈넉한 교회가 보이면 도로도 모르면서 그냥 그쪽 방향으로 달리는 식이었다. 방향은 목적지가 될 수 없으니까 나는 그냥 보이는 대로 달렸던 셈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그곳, 독일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바이트넝이라는 동네를 여행했다.
2. '여기에 왜 오신 거죠?'
타에코의 동기, 그녀의 욕망 따위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는 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제대로 설명되는 인물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된다. 봄이면 나타나 빙수를 팔고 체조를 가르치는 사쿠라씨도, 많은 손님이 필요 없어 간판을 제대로 세우지 않는 주인아저씨도, 매일 왜인지 모르게 숙소에 나타나 아침밥을 함께 먹는 하루나도, 영화는 누구 하나 제대로 설명하질 않는다. 그러니 때론 지루하고, 이게 무슨 영화야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설명된 어떤 공통점이 있다. 바로 '타소가레루'가 특기인 사람들이라는 것. 이 마을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런 사람들만 모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장사가 잘되면 곤란해서 간판을 작게 단다던지, 매일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꼬박꼬박 빙수를 먹으러 간다던지, '왠지 불안해질 때쯤 2분 더 가서 우회전'이라는 식의 약도를 그린다던지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는 '타소가레루' 하는 영화인 것이다.
결국 이 영화를 불편해하거나 지루해하는 사람들에게 딱히 평양냉면의 맛을 설파하는 미식 코스 프레자처럼 입에 침을 튀기며 이 영화의 맛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분명 너무나 느린 영화고, 사건사고가 없는 영화고, 인물의 동기나 백 스토리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영화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찾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불친절함은 아주 친절하게 이렇게 되묻는다. '여기에 왜 오신 거죠?'
매 순간마다 '와타시와 켓코데스(전 괜찮아요)'를 입에 달고 다니던 타에코가 마린팔레스에 다녀온 뒤로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설득도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그런 것이 특기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이 마을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영화다. 딱히 뭔가를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거 꽤 괜찮은 삶이지'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3.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중간에 등장한 어떤 인물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도 '여기 맥주 최고!'라는 아주 부러운 대사를 남발하며 꽤 오래 머물다가,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죠'라고 말하고는 '이제 집에 갈게요' 하고 사라진다. 그동안 타에코는 빨간 털실로 만들던 목적 불명의 무언가를 이내 완성한다. 그리곤 곧 그녀도 떠난다.
다시 독일로 돌아가,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가? 책을 읽었다. 아마 핸드폰에 저장된 게 아니었다면 분명 끝이 너덜너덜해졌을 만큼 읽고 또 읽었던 만화를 또 읽었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 우리 집 고양이와 닮은 고양이들을 만났다. 때때로 파란 하늘을 바라봤고, 전신주가 늘어선 밭이 펼쳐진 평원을 걸었다.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해바라기가 잔뜩 피어있던 꽃밭을 봤고, 황혼이 지던 무렵 그 저무는 하늘빛을 온몸으로 받던 하얀 교회가 따듯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봤다. 그리곤 그 교회에서 타종한 10번의 종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나도 그때쯤 이런 식의 여행은 더 이상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영원히 지속될 순 없겠다는 생각.
황혼 아래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영원에 대한 생각을 했다니, 왠지 나도 모르게 이때 '타소가레루'한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나도 그것이 특기인 부류의 사람일지도. 이 영화를 보며 지루하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으니, 오히려 언젠가 이런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 것을 보면.
4.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80미터 더 가서 오른쪽'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곧 봄이다. 사쿠라(벚꽃)씨는 인사도 없이 비가 내리던 여름을 앞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하지만 타에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태연하다. 그녀가 곧 돌아올 것임을 알기에.
시간이 반복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의외로 많은 불안이 사라진다. 사쿠라는 이번 겨울이 끝날 때쯤 돌아올 것이다. 내년에도 분명 좋은 매실 장아찌가 만들어질 것이다. 지도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언제나 이 길 따라가다가 불안해질 때면 거기서부터 조금 더 가서 우회전하니 그곳이 나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린 딱히 이 섬에 찾아가 체조를 따라 하거나 맛난 빙수를 먹어보지 않고서도 이 마을의 주민이 될 수 있다.
사실, 내 삶에도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80미터 더 가서 오른쪽'이라고 말해주는 듯 해 좀 찡했다. 왜냐면 난 요즘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런 지도를 본다면 좀 안심이 될 것 같다. 내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를 때에는 아주 자세한 대축척의 지도보다는 낙서처럼 그린 선 몇 개에 그런 짧은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좀 불안해도 거기서 더 가봐,라고 말하는 편이 안심이 되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바람에 날아간 타에코의 안경(메가네)은 그런 불안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녀가 그동안 세상을 보아오던 어떤 관점 같은 것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