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고래 Sep 16. 2016

'싱 스트리트'를 보고 (또 술마심)

모든 것을 제외한 하나를 원하게 될 때의 그 명료함

1. 파리와 나방


 방에서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보는데 아주 건강한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방에서 영화를 보는 최고의 이유인, 나의 동반자 맥주와 함께 영화를 보기에 아주 상당히 거슬렸다. 나의 동반자 덕분에 화장실을 자주 갔는데, 화장실에는 정체불명의 나방이 곳곳에 붙어있었다. 아주 성가신 것들. 나는 오래도록 이놈들이 싫었다. 그러니까, 파리와 나방이.


 내가 갔었던 파리는 오래된 이상이었다. 글쎄, 파리의 에펠탑이나 몽마르뜨 언덕 같은 것들이 꿈이었던 것은 아니고, 나는 파리의 어느 공원에 가보고 싶었다. '그때 나는 살아있다고 느꼈어요.'라고 어느 영화에서 한 아주머니가 말했던 그 대사가 등장하는 그 공원에. 그리고 한 남자가 어느 광장의 분수 옆에서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죽어가던 그 장면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나는 내 방이 너무 싫었다. 방이라는 것을 가져본 것도 오래되지 않았지만, 나는 내 방을 떠난 어딘가에 늘 가고 싶었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원하는 마음, 그것이 청춘이라면 나는 내 방이 아니라면 어디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에 갈 수 있을까.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라는 것은, 결국 그 하나밖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하나로부터의 영원한 도피는 역설적으로 그 하나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그렇게 하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도 노력했다. 그러니까, 나방과 파리가 날아다니는 내 방이 싫어서 나는 파리를 포함한 모든 곳에 가길 원했다.



2. 모든 음악이 만들어지는 이유, 혹은 과정


 집에서 형편없는 실력으로 기타나 퉁기며 주변의 소음들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던 코너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지역의 괴상한 대안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곳의 모든 것들은 코너를 둘러싸고 있었던 세계와는 다른 것들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들, 사람들. 그런 것들로 둘러싸인 곳에 어느 날 툭 떨어진다는 것은 세상의 종말과 같다. 어제까지의 내 세상은 박살 났다. 나는 이제 새로운 우주에 불시착한 우주인과 같은 심정으로 그곳의 원주민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순조로운 일일까. 당연 그렇지 않다. 외계인의 삶은 고달프고 외롭고 항상 쓸쓸한 것. 코너는 그렇게 점점 소외된다. 그를 구성하던 세상으로부터, 그는 점점 중력을 벗어나는 인공위성처럼 해체당하고 있었다.


 분해당하는 하루하루에 그녀가 나타난다. 정체불명의 그녀는 코너를 한눈에 사로잡는다. '우리 밴드를 해야 해'라고 말하게 되는 과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한다. 그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하니까. 그 정도 이유라면, 15세 소년에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로는 충분하다.


 그 소년이 만든 음악이 그녀를 울렸다면 그것은 영화일까? 소설일까?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지나지 않을까. 사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에 지나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도 없는 이야기를 주어와 목적어를 당신의 이름 대신 애매한 3인칭의 누군가로 치환해서 들려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도대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할 거라면, 왜 음악을 만들어 부르겠는가? 일기나 쓸 뿐이다. 그러니 그녀가 코너의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녀가 덤덤한 듯 자신의 이야기를 답장처럼 들려주는 장면도 당연하다. 그리고 그 장면이 그렇게 담백하게 보는 사람의 마음 한가닥을 퉁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 복잡한 이야기를 당신이 들려준 그 음악처럼, 짧고 명료하지만 순수한 진심을 담아 이야기할 때에, 마음은 전해지고 두 사람의 마음은 이내 와 닿는다. 존 카니는 그 장면을 이토록 명확하게 보여준다.



3. 소년에게 주어진 것들


 그녀, 그의 형, 그의 음악적 동반자 (그들은 정말 시종일관 빛난다)



4.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비유


 모든 이들이 아일랜드를 벗어나고자 한다. 런던을 향해, 런던으로. 내 방을 벗어나 파리로. 그러나 그 거의 모든 항해는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무엇이 있겠는가. 아는 사람? 정해둔 목적지? 꿈을 이뤄줄 조력자? 그곳에 간다면 나의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풀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꿈만 같다. 


 가장 슬펐던 장면은, 코너가 마지막 리허설을 진행하는 장면이었다. 그곳에는 오기를 바랐던 그녀가 있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멋지게 춤을 추고, 자신을 억압하던 교장이 덤블링을 하며 엄지를 추켜세우는 곳이다. 방해꾼이 등장하자 형이 나타나 펀치를 먹이는 곳이다. 모두가 코너를 향해 열광하고, 싱 스트릿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다 함께 춤을 추고 모두가 아름답다. 그 모든 장면이 슬프다. 누구나 그렇게 바라는 장면이 있으므로. 그리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 장면은 결국 슬픔으로 끝나기 마련이므로. 


 그래서 이 영화를 더욱 사랑스럽게 여긴다. 정신 차린 현실에서 관객들은 때로는 열광하고 때로는 욕을 하며, 반절은 환호하고 반절은 꺼지라고 조롱하므로. 어처구니없게 포장하거나 그럴듯하게 결말짓지 않으므로. 코너가 조용한 곡 하나만 할게요,라고 말하는 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유를 보내며 관객석을 떠나므로. 


 그러나 그 모든 야유와 조롱은 전혀 코너에게 상관이 없다. 앞서 말했듯, 모든 음악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다.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음악은 그 교묘한 3인칭을 누구나 2인칭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감춰둔 음악들을 말한다. 특정한 시간, 특정한 공간을 말하지 않고 누구나 겪었을 법한 계절과 누구나 있었을 법한 풍경을 그리기 때문에 그 편지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믿게 만드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코너의 그 노래를 아무도 듣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 그 노래가 한 사람에게 들릴 수 있다면,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코너가 부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니까. 세상이라는 불특정하고 엉뚱한 무언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단 한 사람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되는 것이 낫다. 누군가의 코스모가 되는 것이 세상의 락스타가 되는 것보다 아름답다.


 나의 파리는 그녀의 첫 런던과 같았다. 모든 것이 생각과는 달랐지. 그러나 그들은 다시 런던을 찾는다. 내가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찾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제외한 하나를 원한다. 그녀(그)와 함께 런던으로 가는 그(그들)는 분명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청춘의 결말은 그런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원하며 방황하다가, 모든 것을 제외한 하나를 원하게 될 때의 그 명료함, 그 푸르름, 그 순진무구함 같은 것들. 그러니 나는 이 영화의 모든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 횡설수설한 이야기에 붙여


 존 카니는 이제 칭찬받아 마땅하다. 두 소년이 음악을 만들고, 하나의 코드에서 시작한 구절이 세션이 얹혀가며 생기를 얻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씬은 비긴 어게인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음악영화를 만들기에 그의 감성과 스킬은 더할 나위 없이 성숙했다. 원스보다 사랑스럽고 비긴 어게인보다 활력이 넘치는 이 영화를 누구에게나 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경'을 보고 (술마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