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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Sep 17. 2015

우리의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150920(3) : 베트남 하노이, 성요셉대성당에 가기 전

– 성요셉대성당 가기 전 카페에서 득과 나눈 대화


 카페에서 쉬고 있을 때, 시켜놓은 음료가 거의 바닥을 보일  때쯤 대뜸 득이 이렇게 물었다. 


공허함이라는 게, 어떻게 느껴지는 거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그런 거 말고, 자신과 밀접히 닿아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음에도 존재하는 공허함 말야. 


 빨간색 인테리어로 뒤덮인 카페에서 이런 질문을 들으니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쉽게 대답할 순 없는 문제였지만, 나는  오래전 보았던 영화 속에서 한 주인공의 대사를 인용해서 설명해보려 애썼다. 


 예전에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가 외로움에 찌든 청춘 남녀들이 불륜도 하고 서로 남자친구 여자친구랑 섞여서 잠도 자고 그런 신파적인 내용이었거든. 그런데 그 영화의 주인공인 여자 엔이 이렇게 말해. ‘외로움은 인간 본성의 것’이라고. 나도 보면서 속으로 그 말에 동의했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하잖아. 남들과 엮이지 않는 한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 인간인거지. 그런 사회적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은 심지어 장애로 분류되기도 하고. 


 별로 대답이 된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어찌되었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그거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고자 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며, 따라서 누구든 언제나 일정량의 외로움은 갖고 있는 법이라고. 아마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도 3그램 쯤의 공허함은 갖고 있지 않을까? 아니, 공허함은 비어 있다는 단어니까, 3미리쯤의 직경을 가진 구멍쯤은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첫 여자친구와 이별한 이후, 나 역시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공허함에 매일매일 계속해서 어둡고 습한 곳으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생각보다 그녀를 깊게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녀가 내게 항상 더 많은 사랑을 갈구했고, 내가 주는 관심이 부족하다고 말했었다. 그녀가 나를 더 많이 좋아했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그녀를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온 내가, 이별 뒤에 찾아온 큰 공허함에 짓눌려 고통받은 그 시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잔 속의 얼음마저 다 녹고 있었다. 


 그럼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조언이 필요한 거지? 스스로가 항상 외롭다고 느끼고, 노력해봤지만 그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득이 말했다. 나는 평상시에도 스스로를 외롭다고 느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 공허함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라고 말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잊게 만들어주거나 그것들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말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본다던지, 책을 읽는다던지 하는 내향적인 취미를 가지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산책도 훌륭한 취미 중 하나지. 요즘 미국 마라톤계의 트렌드가 즐겁게 오래 멀리 천천히 걷자는 거던데 말야. 


 사람들과 만나고 있을 때 공허함이 잊혀진다면 그건 잠시 숨길 수 있는 공허함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건 중증으로 치부될 병까지는 아니고, 충분히 평범한 사람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라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혼자 있을 때 망상과 공상에 빠지지 말고, 혼자 있을 때도 즐길 수 있는 취미를 만들면 좋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내가 몇 년 전, 나를 그 어둡고 습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가장 큰 행위는 바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나는 세상의 많은 슬픔들은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치유된다는 한나 아렌트의 믿음을 믿는다. 말이던, 글이던, 그 무엇으로든지 우리의 슬픔을 객관화시키고 서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슬픔은 치유될 수 있다. 내가 그랬듯이, 그리고 세상 수 많은 소설과 영화들 중에는 사실 그 창작자들이 스스로의 슬픔을 이겨내려 만들어진 것들이 많듯이.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는 않았다. 사실 이런 일반론은 스스로 알지 못해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뿐더러, 누군가가 시켜서 기록하는 행위는 공허함을 이겨내는 것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녹은 얼음물까지 다 마셔낸 후, 우리는 새 물을 더 주문하여 마셨다. 건너편에 앉은 금목걸이를 한 현지인 아저씨의 머리 위로 큐브 속에 들어간 조명이 노랗게 빛났다. 


재현의 말처럼, 외로움과 심심함은 참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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