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 때 방콕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한 시간 정도 스콜이 쏟아진다.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는 스콜을 바라보고 있으면 넋을 놓고 그것만 바라보게 된다. 잠시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다. 어릴 적 지리 수업시간에 열대우림과 스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 번도 열대우림 지역을 가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아득하게 그리워서 온 몸에 힘이 빠지곤 했었다. 왜 그랬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참으로 신기하다. 나는 아마 전생에 태국에서 살았었나 보다. 서울과 방콕을 오가면서 산 지도 벌써 사 년이 다 되어가지만 어릴 적 아득하게 먼 땅이라고만 느껴졌던 열대우림 기후의 나라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이 요즘도 가끔 신기하게 느껴져 가슴이 철렁하곤 한다.
스콜이 쏟아지면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우산을 펼치고 가던 길을 재촉하기보다는 실내로 몸을 피한다. 잠시 실내에 머물며 기다리다 보면 금방 비가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스콜이 쏟아지면 집에서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는 이상은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스콜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세차게 쏟아지는 스콜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그 폭우 속으로 들어가 비를 맞는 것이고 폭우를 맞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스콜이 쏟아질 때 수영장으로 가 폭우를 맞으며 수영을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도 내가 사는 콘도 앞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건물 옥상에 있는 수영장으로 갔다. 폭우 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으니 마음에 있었던 모든 근심 걱정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물속으로 들어가 수면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와있는 기분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어릴 적 꿈꾸었던 비밀요새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도 들었고,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그날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도 들었다.
물속에 있으면 이 세상에 오직 나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지금만이 존재할 뿐이다. 떠올리기 싫은 상처도, 그리워서 마음 아픈 일들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지금, 오직 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지 않고 안심이고 마음이 충만해진다. 가장 그리워하던 그곳 그 풍경 속에 와있으니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닌 것이다. 늘 이방인이 되기를 원했던 내가 꿈꾸던 삶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과거의 상처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관계를 맺지 않고 누구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태국에 지내면서 나는 조금 더 깊이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이라 착각하지 않고 진짜 나의 욕망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늘 모든 관계들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는데 그 관계들은 위로가 될 때보다 상처가 될 때가 더 많았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고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심이 없는 것은 나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없는 사람들은 쉽사리 타인을 경멸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없는 사람들은 고독 앞에서 쉽게 나약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걸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줄 수 있는 인품이 생겨나질 않는다. 나 또한 많은 시간 동안 나의 욕망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태국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한 시간 여 수영을 하고 나니 스콜이 지나갔다. 잠시 쉴 겸 풀체어에 앉아있으니 중년의 커플이 등장했다. 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수영장에 나타났다.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풀 안으로 들어가 헤엄을 쳤고 남자는 풀체어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내가 눈인사를 건네자 그 남성은 다짜고짜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올해로 오십 세가 된 히로시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일본계 기업 방콕지사에서 십 년 정도 일을 하다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그는 사표를 내고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방콕에 있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다짜고짜 묻지도 않은 말들을 마구 내뱉긴 했지만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서 그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면 돈은 얼마나 남았어?” 히로시는 은퇴한 이후 여기저기 돈 들어간 곳이 많아서 이제 서너 달 정도의 생활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만일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떡할 거야?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을 할 거야?” 내가 다시 묻자 히로시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니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을 거야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히로시를 대책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조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정말 사랑하는 것을 향해 대책 없이 부딪혀 보는 것도 필요하다. 모든 일에 완벽한 대책을 세워놓고 움직이려면 대책만 세우다가 인생이 끝나게 마련이다. 나 또한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대책 없이 내가 사랑하는 도시 방콕으로 날아왔다. 당시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히로시 역시 그간에 열심히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은 최소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히로시가 방콕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일 때문에 한국과 방콕을 오가면서 사는지라 한국에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그리운 것들이 많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게 매시간을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서 보내는 중이다. 방콕은 그럴 수 있는 도시니까. 내일도 폭우가 내리면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갈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나는 그것 가까이에 머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