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용하고 게으르게

어느 활자중독자의 머무는 여행

by 소얀

회사 생활을 하던 즈음에, 꽤나 힘든 일정으로 출장을 갔던 적이 있다. 시차가 자주 바뀌고, 3일마다 낯선 나라에 있는 일이 힘들었다. 호사스러운 호텔에 누워 있었던 적도 있지만, 한 시간마다 어김없이 깨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이곳은 나만을 위한 공간이지만, 나답지 않다고. 나를 위해 대화를 나눌 수도, 마음을 나눌 수 없는 살벌하고 낯선 공간들이라고. 이곳은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낯선 공간이었고, 내일이면 누가 와도 모를 것이다.

그 이후로, 호텔은 하얗고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내겐 낯선 공간이 되었고, 어딘가 맞지 않는 여행을 한 것처럼 느꼈다.



괜찮아, 이 곳은 너다운 곳이니까.


작년 말, 머릿속에 피어나는 생각을 끊고 싶어 두 번의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도시를 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이 끝내주게 많다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기 위해서"였다. 나는 유명하다는 음식을 먹으러 가지도 않았다. 관광지에 내리지 않았고 먹거리를 챙겨 먹지 않았다. 주구장창 잡지와 책만 읽다가 주인장이 내려주는 커피만 마신 여행이었다.

춘천의 유일한 동반자, 방안의 토깽이들

춘천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베트남식 쌀국수를,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소양강 댐이나 닭갈비 골목에는 가지 않았다. 맥주를 한 캔 마시며, 깨알 같은 잡지와 만화책만 주구장창 읽었다. 대신 조곤조곤하고 조용한 친절과 호의를 받았다. 그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연말에 남해에서는 평산리라는 아주 작은 어촌에 머물렀다. 사흘 내내 그 마을에 머물렀다. 아주 작은 마을이라 먹을 것이 제대로 없었고, 멸치쌈밥이니 회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야말로, 호사스러운 여행이라 할 수 없다.

대신에, 나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만났다. 산책을 다니며, 게스트하우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바다를 보았다. 남해의 바다는 위치마다 시간마다 날씨마다 물빛이 달랐다.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조곤조곤하고 조용한 친절을 받았다.

좋은 것들을 대접받았다. 마당 앞의 고양이와 함께 걸었다. 귤과 군것질을 원없이 주시던 주인아저씨가 계시는, 사람 냄새나는 곳이었다. 여행자로서 이름도 직업도 묻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나는 돈을 내고 갔지만, 더 많은 것을 얻고 가는 곳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남해를 둘이서 본다는 호사

아무도 없는 바다 옆 오솔길에는 햇살이 잔잔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했다. 언젠가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직업을 갖는다면, 혹은 그런 여유가 된다면, 이 마을에서 꼭 한 달을 지내자고. 조용하고 온전히 미래를 약속하게 되는 기회일 것이라고.


내가 그 공간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공간들이 나를 먼저 사랑해줬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작은 한 조각을 놓고 왔다. 그리고 산 넘고 물을 건너 그 공간으로 다시 간다면, 그 공간은 나를 기억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대접받은 공간들에 대한 짧은 기록을 덧붙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