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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얀 Jul 29. 2018

나에게 오로지 1년이 남는다면

넘어질 수 있는 권리, 12화를 들으며

고등학교 때, “나없는 내 인생”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일찍 가정을 꾸리게 된 한 여자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로 결심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남편과 아이를 위한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기도 한다.

영화가 끝난 뒤 영화관에서는 엽서를 나누어주었다. 그 당시에는 새로운 시기, 새로운 사랑과 가능성에 목이 말랐던 것 같다. 그때는 세계여행, 새로운 사랑 등 거창한 일들을 썼던 것 같다.

 

오늘 업데이트 된 “넘어질 수 있는 권리” 오디오클립에 제시된 주제. 의외로, 나는 어딘가를 떠나지 않겠다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내 삶을 차분히 정리하고싶다. 내 삶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데스클리닝이라는 말을 생각해봤다. 노트북에 미련으로 뚝뚝 남은 사진과 메모들, 아무렇게나 헝크러진 옷. 가족들을 이런 잡동사니로 곤란해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솔직히 "쪽팔려 죽을 것"같다.

이전에 내가 내일 죽는다면 : 데스클리닝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스웨덴의 여든이 넘은 작가가 자신의 소유물을 천천히 처분하는 이야기다. 나 또한 당장 사는데 필요한 옷가지 몇 벌과 생활용품을 제외하고 처분할 것 같다. 컴퓨터 하드와 SNS를 깨끗이 비울 것 같다. 사진을 열 장만 인쇄해 남기고, 내가 묻힐 장소인 수목장을 알아볼 것 같다. 나무 한 그루에서 나를 떠올리고 싶은 사람들이 내 사진 몇장만 기억해주도록. 

새로운 곳 대신, 추억을 되짚는 여행을 하고 싶다.이 기간동안 여행을 떠나고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짝궁의 손을 붙잡고 여행을 갈 것 같다. 2주정도 느긋하게, 다시 지중해를 방문하리라. 마흔에는 남미를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이 1년동안은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이미 가본 곳들을 가볼 것 같다.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 우리의 프로포즈를 조용히 상기하며 고마웠노라 되뇌일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준비를 하겠다. 나를 키워준 원가족, 그리고 내가 꾸린 새로운 가족. 1년의 대부분은 그들과 함께 보낼 것이다. 아침을 차려먹고, 점심과 저녁을 먹고, 오늘 하루도 고마웠노라 되뇌고싶다. 그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싶고,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해주고 싶다. 나내 얼마안되는 재산이나마 정리할 것 같다. 

의미있는 사이드 프로젝트, 글쓰기를 하겠다. 일년간 나의 마음을 정리하는 글은 꾸준히 남기고 싶다. 다만 이 책이 펴내지길 원하지는 않는다. 글들을 작게 추려 인쇄한 뒤, 가족들에게 내 마음을 대신해 전할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생각해보면 이걸 못 하고 죽으면 억울하다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폴댄스 잘추는 30대가 되고싶고, 환갑때는 샴고양이를 키우고싶다고 웃으며 말하지만, 내 삶의 옵션일 뿐이다. 언제 가더라도 정갈하게 가고 싶다. 그리고 주말은 가급적 가족을 챙겨야겠다. 지금 내가 주말을 보낸 방식처럼. 대신 더 진심을 담아 눈을 자주 마주치고, 시덥잖아 보이지만 나에게는 의미있는 대화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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