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백만장자는 아니고 이웃집 만장자는 되어야지
올해 말까지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고, 가족도 만나지 않고 그저 집에서만 지내는 연말을 맞이했다. 어디도 나가지 말아야 하고, 몸은 안 좋으니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전에는 생일엔 선물 대신 꽃과 케이크면 충분하다고 고백했지만, 이번엔 꽃도 케이크도 없었다. 호캉스도 와인도 바닷가 가는 여행도 없었다. 연초는 제주도에서 맞이했지만, 이번 연말은 집에서 심심하게 지나갔다. 카운트다운조차 없이.
12월 31일을 돌이켜보자면, 새벽까지 다음주에 잡힐 면접 사전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성했다. 31일 열 시까지가 마감기한이었는데 혹 아침에 마무리하려다 마감기한을 놓칠까봐 불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줌으로 진행하는 운동을 따라했다. 그리고 가지 파스타를 만들었다. 냉장고에 며칠동안 굴러다니던 가지와 양파, 다진마늘과 청양고추를 넣고 볶다가 홀토마토 통조림을 열어 삶아둔 숏파스타와 섞었다.(참조한 레시피)
오후에는 남편이 맛있는 빵을 먹고 싶다 해서 신촌 현대백화점까지 갔었다. 원래대로라면 신촌 정도는 집에서 한 시간정도 걸어서 갈 거리인데, 날씨가 살을 에는듯해 버스를 타고 후다닥 다녀왔다. 우리 부부는 위가 작아서 케이크를 사는 대신 작은 디저트빵들을 여러개 주워왔다. 이브날에도 똑같이 그 빵집에 갔었는데, 다들 케이크를 사려고 난리였다. 올해는 기분을 낼 수 있는게 집에서 예쁜 케이크위에 촛불을 붙이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겠지. 오늘도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내가 보아도 참 케잌은 예뻤다. 우리는 오렌지 마멀레이드 조각케익, 초코 브라우니 두 조각, 포슬포슬한 카스테라 세 개를 사 왔다.
저녁에 잠깐 지인들과 함께한 랜선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리코더를 불었다. 며칠 전 리코더를 사서 불고 있는데 취미로 부니까 스트레스가 날아간다고 자랑하면서. 그러다가 열한시쯤 남편하고 편지를 서로 써주기로 했던 것이 기억나 며칠 전 사온 편지지를 꺼냈다. 편지를 쓰는 와중에 오늘 배달온 알배추가 죽어가길래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였다. 그때였다. 시계가 12시 00분으로 바뀐게. 사실 남편하고 카운트다운 영상 같이 보고 싶었는데, 그냥 된장국을 끓이다 2021년이 되었다. 내 편지는 매우 짧았지만, 남편의 편지는 이 시시콜콜한 오늘 하루를 담고있어서 읽으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31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요리를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친구들과 웃으며 리코더를 불다가 된장국 끓이고 끝나버렸다. 연말 마무리 글조차 못 쓰고.
돈을 아예 안 쓴건 아니지만 당연하게 여겼던 호캉스, 와인, 여행, 꽃, 스테이크가 없던 이 날을 왜 기억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 2020년에 나는 돈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코로나 시기에 실직하는 사람이 많아 생계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하반기 세 달 동안엔 나도 180만원의 실업급여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땐 솔직히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자주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얼마만큼의 돈을 쓰는가? 얼마만큼을 썼을때 행복한가? 내게 필요한 소비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것인가? 돈을 아끼는게 좋은가? 나는 돈의 파이프라인을 늘리고 싶은가? 좋은 물건 하나를 사는게 좋은가? 아니면 그 좋은 물건조차 과잉일까? 어떤 소비는 참을 수 있고 어떤 소비는 해야 하겠는가?
사람들마다 답이 다를것 같아 다양한 글과 영상들을 보았다. 특히 다른 사람의 가계부들도. 좋은 물건을 맘껏 쓰는 이야기(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아예 청소기도 없앤 20대 커플(단순한 진심), 해외여행과 헬스장을 비웃는 전직 독일 귀족의 책(우아하게 가난해지기), 패션 에디터가 고백하는 사치와 가난에 관한 이야기(우아한 가난의 시대), 만오천원으로 의식적인 절약을 하는 주부의 이야기(최소한의 소비), 안정된 주거환경을 손에 넣은 비혼 여성의 이야기(1인 2묘 가구), 심플한 사치라는 좋은 키워드를 주운 부부의 소비브이로그(고유로운 생활) 등등.
운신의 폭이 좁아진것도 한몫 했다. 우선 여행과 호캉스, 카페에서 멍때리기와 외식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게 되면서 나는 이 공간들이 없는 삶을 어떻게 채울지 생각했다. 경험과 여행이 없으면 심심한 삶일까? 나는 이전에 버킷리스트를 더이상 쓰지 않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안 해봤을때는 스쿠버다이빙도 하고 싶었는데, 사실 나는 물을 무서워하니 어울리지 않았다. 영어 말고도 5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전부 시도해봤지만, 초급에서 중급을 넘어가지 못했고 그렇게 본의 아니게 프랑스어, 일어 자격증이 있지만 막상 한 마디도 못해 이력서엔 절대 적지 않는다. 마흔살에 남미를 가고 싶었지만 이젠 가지 않아도,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냥 괜찮다 생각했다. 왜냐면 1년 뒤는 커녕 한달 뒤도 모르니까.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면서 해보고싶은 모든 경험을 다 누리기엔 내 에너지가 부족하니까. 나는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된장국 끓이면서 즐거워해야 할 좁은 폭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인생은 길다. 코로나 탓인지, 이제 모든 경험을 다 누리는 삶이 버거워졌다. 어떤 버킷리스트를 채우는 삶보다는 그저 읽고 쓰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 물론 다시 해외여행이 정상화된다면 가고 싶은 나라들이 있지만, 이제 가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취향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정말 좋아했던 커피와 맥주, 탄산수도 위가 좋지 않아 자제했다. 회사를 다닐때 주말의 맥주 한 잔이, 점심시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좋았다. 하지만 집에 있다보니 굳이 커피를 마시지 않았는데,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20대 재테크 유튜버 김짠부님의 영상에선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을땐 1)이게 얼마짜리 적금의 이자인지 생각하고 2)그래도 너무 먹고 싶으면 이 동네에서 내가 커피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을때 먹으랬던가. 빈도수를 줄이는 대신 좋은 커피와 좋은 맥주를 마시기로 혼자 다짐했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인 미소가 사는 집 대신 위스키와 담배를 택했다면, 나는 내일 산뜻하게 일어나기 위해 맥주와 커피를 포기할 수 있다. 취향이 날카로운 사람에겐 이게 굉장히 힘든 일, 자아를 자르는 고통일 수 있겠지만, 나는 적어도 좁아진 활동 반경의 폭이 아직까진 그렇게 괴롭지 않다. 물론 연말에 맥주 한 캔 못사온 건 아쉬웠다. 솔직히 이게 사는거냐고 한 세번 생각했지만.. 사실 그래도 좋은 취향을 가꾸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건 여전히 좋아한다. 앞서 말한데로 "좋은 것들"을 고르기 위해 그분들의 리뷰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니까. 그렇지만 난 이제 건강을 위해 취향에 조금 무던해진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아낀다면 무엇이 될까? 일단 그런다고 대단히 돈을 아낀 건 아니라고 말해두겠다. 기적적으로 번 돈의 50%만 소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소비가 줄어든 우아한 가난뱅이가 될 수도 있고, 그만큼 돈을 열심히 굴려 은퇴하는 파이어족을 시도하려 할수도 있겠다. 자산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나는 이 둘의 생활방식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이가 들었을때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다. 며칠 전 읽은 글에 나온 이웃집 백만장자. 낡은 옷을 입고 소박한 집에 살아 언뜻 부자인지 모르는 그런 사람. 셀럽들이 가진 몇백만달러 짜리 집과 차가 연신 나오는 미국에서, 티 안나게 살고 있는 사람들. 그분들 자산 수준이 진짜 백만장자라, 나는 어려워보이지만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이 오붓하게 늙어가고 싶다. 작은 집에서 살면서 반려동물 한 마리 키우고 손잡고 산책하는 노부부. 그리고 주변 이웃들을 돌보고 좋아하는 작가들을 응원하고 아끼는 사람이 되어야지.
우선 이렇게 아끼려면 야채를 즐겁게 장바구니에 담고 요리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요리를 한다면 아직까진 야채가 고기보다는 싸니까. 당분간 맥주는 기념일에만 먹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책 지출 상한도를 정해두되, 좋아하는 작가를 응원하는 포트폴리오처럼 고민고민해서 신중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그런 심심한 어른이 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