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환 May 09. 2020

카이로스의 앞머리 (feat. <나도 작가다>)

카이로스의 뒷머리를 툭툭 치며 후회하지 말고 풍성한 앞머리를 잡자

 * Chance : 하늘에서 우연히 '툭' 떨어지는 기회  

 ** Opportunity : 자신이 '능동적으로' 만들어내는 기회     


 “환아! 형 영어 좀 가르쳐 줘라”      


 나에겐 뚜렷한 목표가 있다. 바로 ‘내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들을 공유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계획과 현실적인 목표는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나름 소소했다.


 때는 약 10여 년 전, 호주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룸메이트 형이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서로의 니즈가 잘 맞았기에 나는 큰 고민 없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해 영어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형에게는 부담 없이 편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고, 나는 그 대가로 종종 맛있는 것을 얻어먹으며 배를 채울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배고픈 유학생에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기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수업을 통해 포만감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던 것 같다. 형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며 내가 더 배우기도 했을 뿐 아니라, 형의 영어 실력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즉, 형의 제안은 오히려 나에게 더 큰 기회였고,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의 첫걸음이었다.      


 어떤 일이든 제대로 된 시작에는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기회라는 것은 생각보다 눈에 잘 띈다.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Kairos)’가 나오는데, 이 신은 특이하게도 앞머리가 굉장히 풍성하다. 그렇기에 확실히 눈에 쉽게 들어오며 손으로 낚아채기도 쉽다. 대신 뒷머리는 민머리이며 어깨와 뒷발에 날개가 달려있기에, 망설이다 놓치면 안타까운 마음에 의미 없이 뒷머리만 툭툭 치다가 날려버리게 된다. 게다가 이 기회의 신은 그다지 자주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회’를 영어로는 chance라고 하는데, 이는 ‘떨어지다’는 뜻의 라틴어 cadere에서 유래했다. 즉, 쉽게 생각하면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은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가 실수로 어쩌다 한 번씩 발을 헛디뎌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으며,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한참을 떨어져 정신없이 헤롱헤롱하고 있는 기회의 신의 축 늘어진 앞머리를 잡아채는 것과 같다.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깨와 뒷발의 날개를 통해 카이로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카이로스는 '때', 즉 찰나의 시간을 의미하기에 기회의 신이지만, 크로노스(우측상단)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한다 (출처 : 직접촬영)

 퇴사하고 유럽여행을 다녀온 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언어 어원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을 모으고 다듬어 가고 있다. 이것은 ‘내가 배워 아는 것을 공유하며 사는 삶’에 가까워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그런데 내가 만약 학교 공부하기 바쁘다는 이유로 룸메이트 형의 부탁을 거절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마 영어 공부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것을 전달해주며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못 느꼈을 뿐 아니라, 이후 내 삶의 방향도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 있다. 그리고 이후 그때의 선택을 후회했을 수도 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놓치다’는 뜻으로 알고 있는 영어단어 miss에는 ‘그리워하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는 보통 망설이다가 놓친 것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미련(未練)을 남기는 것만큼 미련한 행동은 없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을 생각하며 계산기 두드리다가 많은 기회들을 놓치는 것만큼 의미 없는 행동이 또 있을까? 나는 앞으로도 카이로스가 앞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다면 그것을 망설임 없이 잡을 것이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눈앞의 기회를 어이없이 놓치는 경우도 있다. 그때에는 멍하니 카이로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기보다는 능동적으로 기회를 만들면 된다. 기회를 뜻하는 단어에는 chance 말고 opportunity도 있는데, 이는 ob-(가까이)와 port(항구)가 합쳐진 단어인 opportúnas에서 유래했다. 즉, 아무것도 안 하며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항구에 가까이 가는’ 움직임을 통해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 조수와 바람의 상태가 적절한 시기에 입항할 수 있도록 최대한 항구 가까이로 항해해야 한다. 이 글을 쓰며 ‘기회’가 눈앞에 보인다면 바로 잡아서 일을 시작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기회가 떨어지지 않으면 기회를 만들어내도록 무슨 일이라도 ‘시작’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한 번 더 스스로 다짐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터미널에서 시작된 도전 (feat. <나도 작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