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7일 인천공항 터미널. 20대가 시작될 때부터 일명 ‘나만의 버킷리스트’ 첫 줄을 차지했었던 유럽여행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물론 여행 자체에 대한 설렘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해결해야 할 하나의 숙제처럼 남아있던 것이 해결된다는 ‘뿌듯함’이 더 컸던 것 같다. 한 달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체코, 스위스 등 총 12개국 21개 도시를 돌아다녔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한 달이 금방 지나갔고, 다시 그 여행의 시작점이자 도착점인 인천공항 터미널로 돌아왔다. 물론 여행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남긴 했었지만, 이상하게 그다지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그 시점부터 ‘버킷리스트’ 두 번째에 자리 잡고 있던 또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유럽여행과 언어의 어원 등을 소재로 한 ‘책 집필’이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 터미널
사실 나의 버킷리스트 첫 두 줄을 지우는 시작점이었던 ‘터미널’이라는 단어에는 ‘시작’의 뜻이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인 ‘끝’의 의미밖에 없다. Terminal은 ‘끝,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terminus(테르미누스)에서 유래했는데, 즉 일종의 여정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의미다. (참고로 이 라틴어에서 유래된 영화 제목 <The Terminator(터미네이터)>는 ‘끝내는 사람’의 뜻이다) 하지만 터미널은 그 어원과는 달리 단순히 끝나는 지점만은 아니다. 공항이나 항구의 터미널에 가면 알 수 있듯이 그곳에는 departure와 arrival, 즉 출발과 도착이 다 있다. 누군가에게는 출발점 혹은 ‘시작’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착점 또는 ‘끝’이 되는 이중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의 경우 고등학교 3학년을 terminale라고 하는데, 고3은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정규과정이 모두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대학, 아니 사회로 나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것만 봐도 ‘끝’에는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이 새로운 ‘시작’과 같은 의미라고 했는데, 사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끝’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이어트를 시작한다는 것은 밀가루 음식이나 탄수화물과 작별을 고하는 등 기존의 식습관에 마침표를 찍는 것과 마찬가지며, 금주나 금연을 시작한다는 것은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또한 남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는 상처와 사랑, 후회와 애틋함 등의 감정을 공유했던 전 연인과의 헤어짐, 즉 관계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들은 기억까지 지우려 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보면 나의 버킷리스트 첫 두 줄을 지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퇴사’라는 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3년 반 넘게 잘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며 ‘안정적인 삶’을 끝냈기 때문에 유럽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한 달’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유럽여행을 다녀오면서 하나의 여정을 끝냈기에 이를 토대로 ‘책 집필’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져 버린 것과 이별하며 그 끝을 맺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과 환상이 있지만 이를 행동에 쉽게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도 항상 ‘꽃길’이 보장되지 않을 뿐 아니라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막막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사람은 알 안에서의 편안함을 깨고 껍질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날아가려는 새와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새가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한, 즉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 아브락사스에게로 향한다는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오면 자신이 꿈꿔왔던 미래(선)가 펼쳐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추락의 나락(악)으로 빠질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끝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뉴스에서 매일 떠들어대는 소리가 ‘청년 취업난’이었기에 ‘유럽여행 갔다 와서 취직 못하면 어떡하지?’ ‘작가 등단도 못하는 것 아닐까’ 등의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퇴사한 뒤 유럽여행을 다녀왔기에 우선 하나의 버킷리스트(유럽여행)는 시작과 끝 방점까지 찍었다. ‘책 집필’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일단 시작했기에 운 좋게도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 등단할 수 있었고, 좋은 공모전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까지 생겼다.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책 집필’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나면 다시 새로운 시작이 기다릴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