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때 나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육군사관학교 진학’. 여의치 않은 가정환경 때문에 정한 길이었지만 점차 그 학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멋들어진 제복을 입고 당당하게 사관생도 입학식에 서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고등학교 진학 후 이과를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육군사관학교의 경우 이과 경쟁률이 문과 경쟁률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내가 이과, 특히 과학과 수학 머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잔머리 굴리기 대 실패였다. 결과는? 당연히 1차 시험 문턱에서, 그것도 턱없는 점수로 탈락했었다. 그때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자책하며 시간 낭비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조금만 덜 자고 더 열심히 공부할걸’ ‘왜 바보같이 문과가 아니라 이과를 선택했을까?’
이후 수능 점수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에 재수를 했다. 물론 이 때는 문과로 바꿨고, 운 좋게 1차 시험(국영수)과 2차 시험(면접, 체력)까지 합격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최종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관문이자 3차 시험인 수능까지 치러냈다. 그런데!! 수능을 망쳐버렸다. 이런. 다른 과목들은 전부 1, 2등급 받았었는데 영어가 5등급이 나온 것이었다. 당시 그 충격은 잊을 수 없었다. 제일 자신 있던 과목에서 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는 당연히 물 건너갔었고, ‘국어’와 ‘영어’ 점수는어디를 지원하든지 필수로 반영되는 문과였기에 다른 대학교 진학도 어렵게 되었다. 제대로 실패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지원은 3수까지 가능했지만 더 이상 의욕이 생기지 않았었다.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전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모님께서 제안해주신 것이 ‘유학’이었다. 당시에도 집안 사정이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학비를 지원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후에는 거의 3수하는 마음으로 영어공부에 매진했다. 대학 입학을 위해 IELTS 시험 성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상에만 앉아 있을 거면 뭐 하러 여기 왔냐? 밖에 나가서 외국인 친구 만나야 영어실력이 늘지’ 등의 구박 또는 충고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밥집에서 접시 닦아서 생활비 마련하고 남는 시간에는 책만 들여다봤다. 마음의 여유 따윈 없었고 일과 공부 외에는 전부 시간낭비로 여겨졌었다. 결국 원하는 점수를 받았고, 학위 따는 시간을 1년 줄이기 위해 호주의 어느 대학교로 진학했다. 이로 인해 육사 진학 실패로 인해 바닥 쳤던 자존감이 조금 회복되는 듯했다.
‘이제 대학교 진학했으니 조금 여유를 가져볼까?’라며 생각했었는데, 호주 대학 성적 시스템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다시 사라졌다. 참고로 호주에서는 대학교 성적을 HD(High Distinction), D(Distinction), Cr(Credit), P(Pass), 그리고 F(Fail)의 5개로 구분한다. Distinction(차이, 뛰어남)은 ‘오 공부 좀 했나 보네?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성적이 꽤 뛰어난데?’의 뜻이 되며, Credit(신뢰, 신용)은 ‘그래 공부하려고 노력 좀 했다는 것 믿어줄게’, 그리고 Pass(통과하다)는 ‘겨우 통과는 했네’의 의미가 된다. 마지막으로 제일 낮은 등급인 Fail(실패하다)이 문제였다. 이는 ‘쯧쯧 50점도 못 넘었네. 너는 패배자다’라는 비난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내 목표는 하나였다. 바로 ‘F학점 0개’
호주 대학교 성적표 (출처 : 직접촬영)
우선 F학점에 대한 대가가 컸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호주 대학교의 경우 F를 받으면 해당 과목은 대략 3백만 원 가까이 되는 학비를 내고 재수강해야 한다. 돈도 돈이지만 반년 가까이 시간 낭비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F학점, 즉 0점의 학점은 재수강을 해도 그대로 남기 때문에 평균학점을 다시 올리기 어려워진다. 정말 살 떨리고 두려웠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다시는 실패자 또는 패배자가 되기 싫었었다. 물론 F학점 하나 받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실패자’라고 규정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도 혼자 치열했지?’라며 생각하지만, 당시엔 절박하고 또 간절했다. 물론 수능점수와 대학성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당시엔 왜 그랬을까? 아마 ‘실패’라는 단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니, 거의 노이로제 격으로 실패에 치를 떨었다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인 듯하다.
나는 지금도 ‘실패’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사전에서 이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실패하다’를 뜻하는 영어단어 fail의 어원은 ‘발을 헛디디다’는 뜻의 라틴어 fallere인데, 즉 실패했다는 것은 단순히 한 번 발을 헛디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낭떠러지에 걸쳐 있지 않는 이상 발을 잘못 디디더라도 잠깐 몸이 휘청댈 뿐 별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게다가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실패’라고 규정지어 버리면 그때부터 책임소재를 따지기 시작한다. 이 경우 가장 쉬운 것이 ‘남 탓’이고 그다음이 스스로 자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건전한 방법이 아니다. 남을 탓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핑곗거리를 찾아낼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스스로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독이 된다. 반면, 그 실패를 내 책임으로 돌리면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엔 혼자와의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한다. 이성적인 내 좌뇌는 ‘빨리 문제를 분석하고 얼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라며 몰아붙이는데 감성적인 우뇌는 ‘기다려봐. 나 지금 너무 우울해. 시간을 좀 줘’라며 거의 울먹인다. 그 와중에 내 손은 떨어지는 자존감을 잡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목표했던 것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굳이 실패라는 해시태그를 단 뒤 누군가를 탓해야 할까? 예전에 김영하 작가가 알랭 드 보통을 언급하며 ‘그리스인들처럼 생각하면 인생이 편해진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어떤 일이 잘못되면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헤어지면 ‘에로스 신이 사랑을 거둬갔구나’라고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혹은 ‘실패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며 실패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성공을 ‘실패’라는 두 글자와 엮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성공은 영어로 succ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은 ‘~에 뒤따라오다’는 뜻의 라틴어 succedere이다. 즉, 성공의 전제조건이 ‘실패’가 아니라는 의미다. 성공 앞에는 여러 차례의 도전과 시도, 그리고 시행착오 등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호주와는 달리 라틴어로 등급 표현할 때 가장 낮은 등급을 ‘좋다’는 뜻의 bene라고 정한다고 한다. 참고로 이 bene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카페 브랜드 이름인 ‘카페 베네(Caffe bene)’로 친숙하다. 이렇게 긍정적인 문맥에서만 사용되는 단어가 최하위 성적을 표시하는 데 사용된다니 조금 낯설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굉장히 묵직하게 그리고 의미 깊게 다가오기도 한다. ‘실패했다’가 아니라 노력했으니 그걸로도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새롭게 도전하다 보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가 많을 것이다. 그때마다 실패했다고 말할 것인가? 면접 몇 번 떨어졌다고 ‘이번에도 취업 실패했네’라고 하거나 누군가와 헤어졌다고 ‘난 왜 매번 사랑에 실패하지’라며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나도 여태껏 도전해보지 않은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고 공모전에 참가하거나 출판사에 투고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거절을 당했기에 아직 내 이름으로 된 책은 출판되지 않았지만, 나만의 ‘작가 되기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사실 언제까지 ‘예술과 학문의 여신인 뮤즈’가 나를 외면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도전하면 나중엔 지쳐서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꾸준히 글 쓰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정신 승리하네’라며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승리’하는 것이 혼자 자책하거나 누군가를 탓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더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오늘도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