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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진미 Sep 10. 2022

이용악의 오랑캐꽃 VS 스카를라티의 제비꽃

[현대문학-with 클래식] 오, 자줏빛 봄날의 청순함이여

문학수업과 클래식!

현대시와 함께 하는 문학수업에 클래식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배경음악으로도 좋고 흥미 유발을 위한 소재로도 잘 어울립니다. 이번에는 봄날 들판에 예쁘고 조그맣게 피어있는 제비꽃과 함께 해 봅니다.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     


오랑캐꽃의 유래

제비가 올 때쯤이면 피어나는 제비꽃을 오랑캐꽃이라고도 불렀다. 꽃의 뒷모양이 오랑캐(여진족)의 변발한 뒷머리와 닮은 까닭이다. 어떤 이는 춘궁기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방 여진족이 제비꽃이 필 무렵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제비꽃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다.    

 

화자는 이러한 오랑캐꽃에서 과거 여진족처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모습을 연상하고 있다. 겉모습만 닮았다는 이유로 부정적 이름으로 불리는 억울함이 일제하 국토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억울함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랑캐꽃에 대해 한없는 연민과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속담에 봄볕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봄에는 자외선이 강해서 피부가 급 노화한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햇빛은 부정적인 시어로 사용되었다. 가녀린 오랑캐꽃을 두 팔로 보호하려는 것은 오랑캐꽃에 연민의 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려에 쫓겨간 여진족처럼 일제하 우리 민족의 모습을 오랑캐꽃에서 본 것이다.      


이용악(1914~1971)은 서정주·오장환과 더불어 1930년대 시단의 ‘3재(才)’로 꼽히던 시인이다. 두만강 인근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다. 일본 유학 중 펴낸 시집으로 당시 문단의 총아였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에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납치되어 그의 시는 남한에서는 금기가 되었다. 1988년 해금되어 비로소 그의 시가 읽혔다.      


그리움, 광화문 글판의 겨울 문구

‘그리움’이란 시 일부가 예전 ‘광화문 글판’의 겨울 문구로 뽑혀 교보생명 건물 전면에 걸린 적이 있었다.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이용악, ‘그리움’에서     


주말 아침 탄천을 산책했더니 자주색 제비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가 삼월 삼짇날이다. 제비는 벌써 왔겠지.      

바로크 시대에 스카를라티(1660-1725)란 작곡가가 있었는데, 이맘때쯤이면 그의 ‘제비꽃(Le violette’이 생각난다.      


스카를라티의 제비꽃

이 곡은 원래 스카를라티의 오페라에 나온 아리아이다. 남자 주인공은 비천한 신분임에도 귀족의 아가씨를 사랑한다. 정원에 핀 제비꽃을 보면서 아가씨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이슬에 젖은 향기

우아한 제비꽃아

너희들은 부끄러워

나뭇잎 그늘에 숨어

너무도 야심에 찬

나의 욕망을 꾸짖는구나     


스카를라티의 ‘제비꽃’은 통통거리는 선율이 아주 귀엽고 밝은 느낌을 준다. 가사의 내용은 비록 슬프지만 선율은 더없이 청순하고 풋풋하다. 봄의 생기발랄함을 그대로 전해준다.      


제비꽃에 대한 전설이 있다.

제우스는 강의 신 이노크스의 딸 이오(Io)를 보자 한눈에 뿅 갔다. 바람둥이 제우스가 가만둘 리 만무하다. 구름으로 변신하여 둘은 사랑을 나눴다. 아내 헤라가 눈치를 챘다. 당황한 제우스가 이오를 암소로 만들자, 제우스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는 헤라가 그 암소를 달라고 했다. 천하의 제우스도 마눌님 명은 어기지 못하는지라 줄 수밖에. 헤라는 24시간 감시체제로 들어갔다. 제우스는 불쌍한 이오한테 아름다운 풀이라도 먹이자는 생각으로 목장 주변에 이오의 눈을 닮은 제비꽃을 피우게 하였다. 하긴 제비꽃은 소들이 잘 먹지. 가엾은 이오,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서양에서 바이올렛(Violette)은 권위를 상징하는 권력의 색이었다. 또 폭력(Violence)과도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방탄소년단의 뷔가 만든 신조어에 ‘보라해’라는 말이 있다. 무지개 색깔의 마지막 보라처럼 상대방을 믿고 서로서로 오랫동안 사랑하자는 뜻이라고 팬미팅에서 그가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이젠 보라해=사랑해의 뜻으로 사용된다. ‘아이 퍼플(purple) 유’는 곧 ‘아이 러브(love) 유’와 동의어이다. 전 세계적으로 정식 등록된 신조어라고 하니 지위가 높은 유명 셀럽들도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보라섬 전남 신안의 반월도와 박지도가 핫한 관광지로 뜨고 있다. 권력과 폭력의 냄새가 나는 과거의 음침한 보라에서 밝은 보라로 바뀌었으니 이게 바로 문화 예술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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