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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진미 Aug 20. 2022

정지용의 향수 vs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현대문학-with 클래식]향수의 배경음악으로 최적화된 신세계로부터

현대문학에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원이 바로 정지용의 ‘향수’ 단원입니다. 배경음악으로 ‘고잉 홈’을 들으며 시를 낭송할 때는 정말이지 아득히 먼 고향의 그리운 소리를 듣는 듯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과 함께 있던 그 고향 말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가고파도 못 갑니다

가고 싶은 내 고향! 결코 꿈엔들 잊힐 리 없는.

'향수'가 다양한 감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묘사한 시란 것은 다 아는 사실! 고향의 그리운 정경이 후렴구에서 곧바로 화자의 정서로 집약되어 있어서, 저절로 고향 생각이 나고,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오르게 하는 시이다. 이 시 못지않게 향수에 폭 젖어 들게 하는 음악이 있으니...     


“going home, going home, I am going home ~ ~”.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2악장을 듣고 있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고향 생각에 그냥 막 그곳으로 폭풍 질주하는 내 마음을 통제할 길이 없다. 바로 고삐 풀린 망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가슴 한편을 비집고 들려오는 오보에 선율은 어느새 저 멀리 고향 언덕에서 들려오는 풀피리 소리로 바뀌어 한여름 아이스크림 녹아내리듯 온몸이 향수(鄕愁)로 녹아내리면서 그저 자꾸만 자꾸만 음악에 빠져들게 한다.     

 


정지용과 드보르자크

충북 옥천에서 자란 정지용(1902-1950)과 보헤미아의 한 시골 지방에서 자란 드보르자크(1841-1904)는 시공간을 달리하여 출생하고 생활해왔지만, 어릴 적 자신들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고향 모습을 늘 그리워하였고 결코 잊을 수 없었을 터이니 이런 명작을 창작하였으리라.    

 

정지용의 ‘향수’ 수업을 하기 전에 나는 반드시 시 낭송을 한번 시켜본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제2악장은 ‘going home’이란 노래로도 잘 알려져 '향수'의 문학수업 배경음악으로는 이만한 게 없다. 덕분에 아이들은 서로 낭송하려고 난리 블루스다.      


요즘 아이들이 발표력이 뛰어나고 학습의욕이 왕성해서 저렇게 용기 충천(衝天)하진 않는다. 다 그놈의 ‘세특’ 때문이다. 세부능력 특기사항이라는 항목에 한 줄 기록을 원하는 아이들의 영리함이 주된 이유이다. 생활기록부 세특난에 기록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심정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이 가련한 아이들을 위해 교사는 무슨 건수든 찾아서 기록해주려 한다. 그들의 장래를 위해.     


문학수업의 도입 부분에서 이러한 시 낭송 활동은 내가 생각해봐도 나름 바람직한 수업활동이라 생각한다. '신세계로부터'의 그 달콤한 'going home'을 들으며 '향수'를 낭송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해도 꽤 근사하니까.     


고려가요, 가사, 시조 단원의 수업에서는 나는 또 필사를 주문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신이 나는 듯 열심히 작품을 베껴 쓴다. 그러한 활동을 통해 입에 착착 감기는 듯한 우리말의 운율을 맛보고, 또한 예스러운 우리 글자의 모습을 익힌다면 이 또한 고전문학을 배우는 목적이 아닐까.      


교사의 무한책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성현의 말씀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곳이 바로 학교 현장이다. 문제는 학교에서의 배움이 사회 곳곳에까지 스며들어 체험적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건 누구 책임인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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