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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진미 Sep 18. 2022

서정주 신부, 조지훈 석문 vs 그리그의 솔베이지

[현대문학-with 클래식 ] 여인의 정절! 동서양에 통하다

현대문학과 클래식!

현대문학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마을의 설화나 전설도 같이 합니다. 우리나라의 서정주와 조지훈, 그리고 노르웨이의 에드바드 그리그가 노래하는 여인의 정절! 동서양이 함께 합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린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저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신부’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 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년(千年)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조지훈, ‘석문’     


조지훈의 고향 영양에 전해오는 설화가 있으니, 바로 ‘일월산 황씨 부인당’ 설화이다. ‘신부’와 ‘석문’은 이 설화를 바탕으로 쓰어진 시들이지만, 시인에 따라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가 되었으니, 과연 시인들의 창의력은 대단하다.     


여인의 정절은 동서고금에도 통한다

에드바드 그리그와 헨릭 입센은 노르웨이 문학사에 빛나는 별들이다. 두 사람은 문학적 교류가 잦은 문단의 친구들이다. 어느 날 입센에게서 그의 희곡 '페르 귄트'에 들어갈 연주용 부수음악 작곡을 의뢰하는 편지를 받은 그리그는, 이 난해한 희곡에 대하여 상당히 고민했으나 결국 작곡을 한다. 그 작품이 바로 극음악 ‘페르 귄트’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솔베이지의 노래’ 원작자는 입센이다.     


서정주의 ‘신부’와 조지훈의 ‘석문’은 그래서, 페르 퀀트 모음곡에 나오는 ‘솔베이지의 노래’와 그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다. 현대시 수업을 하면서 이런 아름다운 클래식을 안 듣고 갈 수는 없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에드바드 그리그, ‘솔베이지의 노래’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고, 그 떠난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기다림이 아픔으로, 또 슬픔으로 다가온다.      


오줌 누러 가는 새를 못 참아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는다고 오해한, 이 철없는 신랑을 마냥 기다리는 ‘신부’의 화자나, 오로지 그리운 당신의 따스한 손길이 닿아야만 문을 열겠다는 ‘석문’의 화자나, 그리고 천하의 방탕아 페르 귄트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솔베이지는, 모두가 오늘날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노답의 여인이다. 그러나 정절 하나만은 최고다. 동서고금을 살펴봐도 정절(情節)은 여전히 가치 우선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 기다림으로 인해 우리 인생은 행복하고, 기다림으로 인해 우리 인생은 또 불행하다. 그래서 인생은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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