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못다 한 고백

마트와 약국사이

by 완자

명절이 되면 모두 시골에 간다고들 지겨운 듯 자랑하는 듯하는 알 수 없는 대화가 많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다녀와서는 이번에는 몇 시간이 걸렸고 시골집에 가서 무엇을 잡았고 무엇을 먹었고 맛이 어땠고 등등.


나의 외가는 같은 아파트 단지의 옆 동이었고, 친가는 한강 다리 하나 건너면 있는 당시에는 비교적 드문 일가친척이 1시간 정도 거리에 모두 모여 사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나는 시골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시골집의 화장실에 대하여 깔깔거리며 이야기해도 그저 먼 옛날이야기 듣는 느낌으로 듣곤 했다. 광고나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할머니가 내주는 푸근한 집밥이라는 것 역시 먹어 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병약하셔서 나에게 밥을 따로 챙겨줄 만큼 힘이 있지 않으셨고, 친할머니한테는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손녀가 아니니 그렇게 애틋할 것도 없는 존재였을 터. 무엇보다 내가 살가운 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갑작스레 친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친할머니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식구가 한 명 늘어났으니 이사를 갈 법도 하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우리 집에 친할머니를 모시게되었다. 방 3개의 구성에 대하여 이런저런 부모님의 토론이 있었겠지만 결국 내가 할머니와 가장 큰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고1이라는 사춘기의 끝무렵에 걸친 살갑지 않은 손녀는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쓴다는 것 만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일기시작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나만의 공간’을 앗아간 짧디 짧은 내 인생 최대의 적이 되어버렸다.


마치 김동인의 '태형'을 방불케 하는 내 자리, 내 공간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었다. 날 선 말로 할머니의 모든 말을 받아쳤고 밀어냈으며 등을 돌렸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한 번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다. 오랜 기간 정 붙이며 살던 곳을 떠나 낯선 큰 아들 집에서 살게 됐지만 이렇게 고약한 아이와 같이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하루는 드시던 약이 궁금하다고 껍질에 있는 영어 단어를 좀 찾아보겠다시며 나에게 영어사전을 빌려달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영어단어를 사전에서 찾을 줄이나 아시나?!'

그러고 나니 퍼뜩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고등학교까지 나온 '신여성'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약사셨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남편에게 물었겠지만 지금은 물어볼 남편이 없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당신의 허전함이나 슬픔 따위는 눈 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나만의 공간이 사라졌다는 이유에 매몰돼 매일같이 눈을 찢고 지냈을 뿐.


시간이 훌쩍 지나 할아버지의 약국자리에 마트가 들어섰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갈 일이 없었던 할아버지 약국 근처로 결혼 후 이사를 가게 되었다. 마트에서는 세일 전단지를 끊임없이 보내온다. 그 전단지 너머로 할머니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살아계셨을 때처럼 그 얼굴은 단 한 번도 화가 난 얼굴인 적이 없다.


이제와 말하기엔 너무 늦었지만 그곳에서는 편안하시길. 이런 말 저런 말을 보태보지만 나는 이다지도 평범한 죄송하다는 말조차 끝까지 하지 못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전업주부 도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