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과 빨강사이
결혼하기 전 남편과 아이는 낳지 않기로 했었다.
결혼 전부터 누누이 양가 부모님께도 이야기했었지만 어느 정도로 믿고 계셨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남편도 첫째가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저 아이들은 저러려니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반대를 하시지는 않았다. 여하튼 나의 의지는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나라는 인간 하나도 제대로 구실을 못하고 있는데 내 새끼를 키운다는 부담감이 컸다. 거기에 더해 그즈음 친구들의 육아에 지친 모습에 지레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능과 불가능은 동전처럼 등을 마주한 하나라고 하지 않던가. 모임에 함께 나왔던 친구의 딸이 북엇국이 든 작은 유리병을 귀여운 두 손에 꼭 잡고 고개를 15도에서 70도까지 꺾어가며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렇게 귀엽고 소소한 순간, 순간을 함께하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슬쩍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결혼하고 1년 후 속이 울렁울렁 대기 시작했다.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아이가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즈음 친정 식구들과 명절 때 모여 마작을 하곤 했다.(돈은 걸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난무하는 게임시간이었다.) 길게 써놓은 규칙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습득되지 않았지만 여하튼 초록색으로 發자가 쓰인 패와 빨간색으로 中이 써진 패가 좋다는 것만 이해했다.
아이의 태명은 마작패 중에 좋다는 초록색 發패에서 따 와 '녹발이'가 되었다. 빨중이보다는 녹발이가 발음도 단연 귀엽고 한자 획수도 많아 왠지 문학적으로 느껴졌다. 녹발이는 태어나서부터 크게 손이 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얌전하고 온순한 성격에 음식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아이가 커가면서 편식도 심해지고 고집도 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아이가 태어난 첫 해는 친정에서 맡아서 키워주셨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녹발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일요일 밤에 다시 친정집에 맡기는 상황이 반복됐다. 맞벌이였던 우리를 위해 선뜻 친정부모님은 밤낮으로 아이를 돌봐주셨다. 친정엄마의 작은 수첩에는 아이가 고개를 처음 가누던 날짜부터 이유식 메뉴 등등 여러 가지가 적혀 있다. 나는 크게 엇나가는 행동을 했던 건 아니지만 마냥 부모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던 것도 아닌지라 성인이 되고는 부모님의 상심이 크셨다. 그 와중에 내가 한 가장 큰 효도랄까 부모님께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당당함은 녹발이를 낳은 것이다. 흔히 말하는 부모님께 손주를 안겨드린 것이 나의 그간의 고집스러움과 까탈스러움의 반성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녹발이는 빠릿빠릿한 아이는 아니지만 정도 많고 순수해서 아직도 외할머니 집에 가는 날엔 신이 나 아침 일찍 벌떡 일어나 준비를 하고 휘리릭 버스를 타고 사라진다. 외할머니 집에 가면 맛있는 외식 및 할아버지의 용돈 투척, 신나는 티브이타임이 기다리고 있다. 중2에게 이 정도 조건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부모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아이 덕에 슬픔도 웃음도 많아졌다. 이렇게 순하고 착한 아이에게 왜 틱이 생겼을까 생각하면 까맣고 끝도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 있는 느낌일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1+1 행사 마지막 날이라고 온 가족이 달려가 탄산수를 두 손 가득 사 왔는데 이틀 뒤 다시 가보니 똑같은 행사가 시작됐다며 모두 속았다고 깔깔 웃으며 좋아하는 것을 보면 슬픔과 등을 마주한 것은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 날 봤던 친구 딸의 북엇국 원샷스킬처럼 작게 웃음 짓는 소소한 일상들이 깜깜한 터널 안에서도 한발 한발 내딛는 힘이 되게 해주는 것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