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오빠와 친한 언니 사이
재취업과 전업주부사이에 있는 요즈음.
회사원이라는 타이틀이 없어지고, 전업주부라는 조금 낯선 타이틀을 내걸고 지내고 있다. 실상 이 타이틀은 신입사원 수준이다 보니 잘하고 있는 것인지 자꾸 나를 뒤돌아보고 생각이 많아진다. 거기에 온갖 잡념이 더해져 머릿속이 항상 시끄러운 상태다.
잡념을 하나 소개하자면 이 정도 나이가 되니 부정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진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 하나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느낌으로 엄마 옆에 서면 엄마와 닮아 보이고 아빠 옆에 서면 아빠와 닮아 보이는 외모. 쉽게 말해 인상이 아주 옅은, 생김새의 특징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누구를 닮았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여기서 핵심적인 '누구'는 화자의 주변 인물이다. 즉, 내가 그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는 일반인이다. 예를 들면 화자의 친척'오빠'라던지 화자와 '예전에 친했던' 언니라던지.
어느 날은 엘리베이터에 나를 제외한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갑자기 일본어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물론 같이 탄 내가 일본어가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슬프게도 나는 그들의 대화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화내용은 그들의 회사에 근무하는 한분과 내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것이었다. (화자조차 누구인지 모르는 케이스는 처음이었다.) 이어 한 명이 "아냐, 그 언니가 낫지."라고 말을 이었다. 순간, 두 명의 멱살을 동시에 잡아야 하나? 따끔하게 한마디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 한마디는 일본어로 해야 할지, 한국말로 해야 할지를 또 고민하던 차에 둘은 나를 엘리베이터에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떡볶이라는 음식은 재료들의 조합에서 일반인들이 전혀 알아차릴 수 없는 원리로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마약과 유사한 성분이 나온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연구하고 정리하며 토론할 수는 없다. 이처럼 전 세대를 어우르며 골고루 애정을 갖고 대하는 음식은 흔치 않다. 나는 특히 밀떡에 얇고 덜 고급진 오뎅을 조금 넣고 국물을 자박하게 해서 깻잎을 잘잘하게 잘라 위에 올려주는 깻잎떡볶이를 좋아한다.
한동안 일주일에 3번씩 꼬박꼬박 드나들던 분식집이 있었다. 물론 나의 생김새는 인상적이지 않으나 비교적 주문에는 한 번의 변화구를 넣어 나름 인상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명이 먹기에는 다소 양이 많은 편인 떡볶이와 오뎅, 튀김세트를 시키고 "튀김세트에 야끼만두는 빼주시고 대신 김말이로 넣어주세요."라고 꼭 덧붙였다. 한 번도 빠짐없이 이렇게 주문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주인아주머니는 내 주문순서가 되면 "주문은 어떻게 할래요?"라고 물으셨다. 마치 처음 보는 손님에게 물어보는 듯이.
아주머니가 혹시나 내성적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더없이 활기찬 목소리에 오지랖도 넓은 스타일이시다. 더구나 며칠 후 남편과 함께 그 가게를 찾았을 때 아주머니는 남편을 보자마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라며 반가워하셨다.
"저 보이시는 거죠?" 마음 속으로 말했다.
비록 희미한 인상을 하고 있지만 식성은 매우 단호하고 확고하다. 삶의 태도도 단호하고 확고하면 좋으련만이라는 아쉬움은 있으나 유연함을 가졌다고 위안해 본다.
매운 기운으로 잡념도 날릴 겸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떡볶이를 먹으러 가야겠다. 물론 아주머니는 나를 처음 본 듯 "주문은 뭘로 할래요?"라고 물으실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