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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미녀 May 27. 2021

휴직 말고 퇴직

단호박으로.

"그런 이유라면 퇴직보다는 휴직이 낫지 않겠어? 1년 휴직. 그건 내가 해줄 수 있는데."
"제 성격상 휴직이라면 제 맘 편히 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장기 휴직이라면 000 자리를 새로 채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거든. 그러니 걱정하는 것처럼 팀에 민폐를 끼치지도 않고. 우리 팀에 다시 오면 나야 좋지만 만일 그게 싫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팀장님의 카드는 휴직이었다. 나의 퇴사는 아마도 팀장님 조직 운영 KPI에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보다도 오래 일한 멤버를 그만두게 하는 것,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실 터였다.


"... 글쎄요. 저는 퇴사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수없이 돌려본 시뮬레이션에 휴직을 권하는 상황도 당연히 있었다. 휴직을 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할까. 


1년 동안 쉴 수 있다는 것, 1년 후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이 회사는 좋은 회사다. 휴가가 넉넉하고, 휴가에 대한 배려도 높다. 휴직을 원하면 웬만해서는 신청할 수도 있고, 돌아와서도 크게 눈치 보이지 않는다. (인사 평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모두 당연히 쓰는 것들이다. 복직해서도 아이를 키우며 다니기에 좋은 회사다. 시차 출퇴근이 있고, 특별한 경우 아이가 있는 여직원을 우선시하여 정책이 만들어진다. 팀장님도 이 점을 계속 강조한다. 이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두려 하느냐고.


하지만 휴직을 할 거라면 애초에 퇴사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내가 겪는 이 부침은 휴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나의 이 폭풍은 멎을 것이다. 그제야 호수가 되고 잔잔한 물결이 될 것이다. 퇴사를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강한 직관이 그렇게 느낀다.

내가 퇴사 고집을 부리는 건 단순히 그 느낌 때문인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퇴사하기 싫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어떻게든 반드시 퇴사를 해야겠다는 마음가짐. 이 모순된 감정이 함께 있는 나는 왜 이럴까.


"차장님께는..."
"000 차장 하고도 이야기 나눠봐. 나는 000가 휴직을 하면 좋겠는데 완고하니 물러서지만, 혹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0 차장하고 좀 더 오래 이야기해봐. 난 어떤 선택이든 존중해줄 거고."
"감사합니다. 팀장님."


수없이 돌려본 시뮬레이션 상황 중 또 하나. 바로 내 직속 상사인 차장님께 누가, 어떤 방법으로 알릴 것인가에 대한 것. 사실은 팀장님이 말해주길 내심 기대했다. 차장님은 나랑 오래 일하기도 했고 업무가 가장 밀접하게 겹쳐진 사람이라 내가 퇴사하고 나서는 차장님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나의 퇴사 통보를 듣고 있는 그 상황을 떠올려보니 괴롭다. 아마도 차장님이 제일 괴롭겠지만, 그걸 지켜보는 나도 괴롭다. 뭔가 쓰다 보니 변태적인데...


"일단 알겠고 조만간 길게 이야기해요. 날짜 잡아볼게."
"네, 언제든 시간 괜찮으실 때 알려주세요."


남은 건 차장님께 하는 퇴사 통보.

팀장님께 다 털어놓고 나니 마음은 편해지고 긴장감도 90% 이상 내려앉았지만, 다시 차장님께 말을 걸려니 더더욱 눈치가 보이고 죄스러운 감정이 떠오른다. 으, 이런 상태 싫다.


차장님, 오늘 드릴 말씀이 있어...
차장님, 오늘 시간 언제...
차장님, 오늘 시간 되실 때 알려..


메시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 뭐라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팀장님께 쓰던 것보다 더 떨리고, 더 모르겠다.


차장님, 시간 괜찮으시다면 잠시 좀 뵐 수 있을까요?


결국 결정한 메시지 문구는 이것. 평소 업무 이슈가 있을 때 쓰던 말투와 똑같다. 차장님 컨펌을 받거나 뭔가를 알려야 할 때 꼭 이렇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됐다.


그리고 파티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한숨소리.

음, 나 때문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답을 기다리지만,

아마도 나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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