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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달 Nov 16. 2018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망할 수도 있는 건 싫어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여행기

휴가는 꼭 마약성 진통제같다. 당장은 고통을 잊게 한다. 여러번 반복하면 중독된다. 나름대로 작심하고 내린 결정도 무력화한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버티자,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한다.


지난해 2월 말이었다. 한겨울 한파는 진작 물러가고 꽃샘추위마저 비실대던 늦겨울이었다. 나는 입사 이래 일곱 번째 휴가를 맞았다.


어디에 가고 싶다는 뚜렷한 바람은 없었다. 싫은 걸 참을 수 있는 능력만큼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휴가일이 5일 앞으로 닥쳤을 때 ‘땡처리닷컴’에 접속했다. 비자가 필요 없거나 현지 공항에서 바로 발급받을 수 있는 나라 중 비행기 출발일이 내 휴가 일정과 맞는 나라, 아기자기하기보다는 웅장한 볼거리가 있는 나라를 물색했다. 반쯤 충동적으로 캄보디아를 낙점했다.


5시간여 날아가 도착한 씨엠립의 공기는 뜨겁고 습했다. 인천에서 마지막으로 마신 차갑고 마른 공기가 금세 습기로 눅눅해지는 듯했다. 몸은 바뀐 환경에 곧장 적응했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했다. 신경을 한국에서의 일상에서 완전히 떼어놓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내려놓지도 못한 애매모호한 마음으로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더 안절부절했다.


작고 아담한 씨엠립 공항.


씨엠립에 온 지 이틀째 된 날 오후였다. 이렇게 호텔에서 죽은 듯 누워 있기만 할 거면 한국 내 집에서 편하게 돈 안 들이고 누워있지 왜 돈 주고 여기까지 와서 누워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힘을 내 숙소를 나섰다. 시내 작은 여행사에 가서 반나절짜리 당일치기 톤레삽 수상가옥촌 투어를 예약했다. 사장은 마침 한국인 두 명이 있는 팀이 있으니 나더러 거기에 합류하라고 했다.


두 한국인은 부산 출신의 초중고교 동창이라는 석과 민이었다. 둘은 인상이 퍽 달랐다. 석은 눈코입이 뚜렷한 얼굴에 세련돼보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알 만한 브랜드의 딱 달라붙는 운동복에 운동화 차림을 한 그는 단단해보였다. 그는 쉼 없이 아이폰을 만지작댔다. 한국 친구들과 카톡을 하고, 뭔가를 검색하고, 계획을 세웠다.


민은 히피 내지 자연인을 연상시켰다. 몸은 비쩍 마르고 머리는 덥수룩했다. 핸드폰은 하루 종일 좀체 열어보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땐 한 줌만을 들어 올려 조용히 천천히 골똘히 오래 씹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삶을 관광객으로서 구경하는 게 죄스럽고 미안해요. 이 사람들에겐 자연스러운 삶을, 단지 삶인 것을 우리가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잖아요. 사실 톤레삽에 오고 싶지 않았어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톤레삽에 장대 나무들을 높이 세워 집을 짓고 사는 현지인들을 보며 민은 말했다. 그의 감수성과 예민함은 옆에 있는 사람이 왠지 말과 행동을 삼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톤레삽 호수의 수상가옥촌 '깜퐁 플럭'.


이날의 만남은 나름의 인연이 됐다. 우리는 다음날 앙코르 유적지 ‘빅 투어’를 함께 다니기로 했다. 앙코르 유적지 탐방 코스는 크게 두 가지다. 앙코르 문화의 대표 유적인 앙코르와트를 중심으로 바이욘, 따 케오, 따프롬 등을 작은 원을 그리며 도는 ‘스몰 투어’가 하나다. 바이욘을 정 중앙에 품고 있는 거대 성곽 ‘앙코르 톰’의 북동쪽 프레아 칸을 시작점으로 네악뽀안과 따솜, 동 메본, 프레룹 등을 큰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은 ‘빅 투어’라고 한다.


우리 셋은 모두 사람 많은 데를 싫어했다. ‘빅 투어’ 코스에서 비교적 접근성이 좋아 사람이 몰리는 네악뽀안과 따솜, 동 메본 탐방 계획은 과감히 지웠다. 대신 빅투어 코스에서 뚝뚝(오토바이 한 대 뒤에 2~4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달린 마차를 이어붙인 현지 이동수단)을 타고 한시간쯤을 달려야 나오는 ‘앙코르의 붉은 보석’, 압도적인 스케일이 특징인 앙코르 유적 중 유일하게 크기가 아담하고 조각이 유독 섬세하기로 유명한 반띠에이 쓰레이와 그 인근의 반띠에이 쌈레에 갔다. 이동시간 동안 서로 별 말은 하지 않았다. 밖에서 바람 쐬며 여럿이 같이 멍을 때리니 호텔에서 혼자 멍하니 있을 때보다 걱정들이 좀 더 잘 옅어지는 듯했다.


한낮에 맹렬했던 열기가 점차 수그러들던 오후 4시쯤부터 우리는 일몰 볼 채비를 했다. 학자들이 왕실의 화장터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높은 건물 쁘레룹의 꼭대기에 올라가 석양이 내리길 기다렸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석은 대기업 직원이었다. 민은 좀 복잡했다. 한 때 요리사였다가 한옥 짓는 목수 생활을 했다고 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도서관을 다닌다고 했다. 어릴 땐 기타를 치며 비틀즈 수준의 록커를 꿈꾸다 나중엔 영화감독을 꿈꿨다고 했다.


어쩜 저렇게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처럼 살까. 그가 부럽다고 생각하다가 “나도 기타를 친다”고 대꾸했다. 민은 불쑥-그러나 이상하게 자연스럽게- 내 왼손을 잡았다. “기타 친 사람 손 맞네요. 손톱이 뭉툭하고 짧고, 손끝은 단단하고.”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아닌 체 했다.


쁘레룹 꼭대기에서 본 석양.


시내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땀과 습기에 젖은 지도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다음날 할 ‘스몰 투어’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앙코르 유적지의 꽃이라는 대망의 앙코르와트 탐방 계획이 포함돼있었다.


이런저런 일정을 얘기하다가 어느 대목에선가 내가 “안 되면 뭐 안 되는 대로 방법이 있겠죠”, “그럴 수도 있죠 뭐” 따위의 말을 했나보다. 그 때 민이 끼어들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에요. 혹시라도 언젠가 제가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가훈으로 삼고 싶은 말이었어요.”


나는 기분좋게 당황했다. ‘처음 알게 돼 고작 이틀째 본 사람과 서로 통하나’ 하는 느낌이었다. 특이한 생각이 함께 들었다.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같은 ‘도인(道人)’에게 인정을 받은 기분이랄까. 사실 내 일상에는 ‘그럴 수도 있지’ 보다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어야지’ 같은 억지 고집이 더 많다. 그런데 이 일탈적인 여행 중 나도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들을 속으로 다시 뇌까렸다. ‘안 돼도 뭐, 괜찮지. 그럴 수도 있지. 아무래도 상관없지.’ 내가 늘 그런 마음이길 바랐다.


‘스몰 투어’를 하기로 한 날이자 내 휴가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공기가 유난히 꿉꿉했다. 나한텐 여행만 갔다 하면 극 건조 지역에조차 비가 오는 징크스가 있다.


“오늘 비가 올까요?”


투숙객들이 조식을 먹는 식당 한구석에서 커피 한 잔을 탁자에 놓고 신문을 보고 있던 호텔 사장 샘 소핍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잠깐 밖을 내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정도로는 비 안 와요. 오늘 어디 가요? 앙코르와트요? 돈 워리. 비 안 올 거예요.”


샘 소핍 아저씨의 호텔에서 내가 묵었던 방의 발코니.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질 않나. 캄보디아 현지인인 샘 아저씨의 육감보다 내 징크스가 더 강했다. 오전에 바이욘과 바푸온을 돌아보고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왔더니만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까지 난리였다. 우산을 쓰면 우산이 뒤집혔다. 바람에 회오리를 타듯 솟아오른 낙엽들은 제멋대로 사람 얼굴에 덤벼들었다. 


이틀째 우리 뚝뚝을 몰아주던 기사 쌈낭은 “비는 와도 상관이 없는데 바람이 이 정도로 불면 돌아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계획대로라면 점심을 먹고 앙코르와트에 갔어야 했다. 비가 어찌나 대차게 내리던지, 어쩌면 앙코르와트를 못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식당 밖 작은 오두막에 해먹 여러 대가 매달려 있었다. 몇몇 여행자들은 거기에 누워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에라 모르겠다. 나와 석, 민도 각자 해먹 하나씩을 잡고 누웠다. 비는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햇볕 가리개 용도로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이불처럼 덮고 눈을 감았다. 민은 아예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청했다. 바람이 많이 불었고 공기가 좋았다. 어느 순간 그가 “추워요?”하고 물었다. 나는 “추워요.”라고 답했다. 뭐 어쩌랴. 우리는 서로 어쩔 줄을 몰랐다.


바람이라도 좀 가시길 바랐다. 비에 젖은 스카프 위를 바람이 훑고 지나가니 정말 추웠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앙코르와트를 못 봐도 뭐, 그럭저럭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먹 위에서 조금씩 흔들리며 계속 바람을 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이렇게 있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오두막 해먹에서 띵까띵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바람이 약해지고 비가 잦아들었다. 해가 조금씩 보였다. 우리는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폭우 때문에 앙코르와트를 벗어난 관광객들이 아직 채 돌아오기 전이라 붐비지 않았다. 폭염은 누그러지고 공기는 맑았다. 전화위복이 이런 건가. 나는 결국 ‘앙코르와트를 본 여행자’가 됐다. ‘캄보디아까지 와서 정작 앙코르와트를 못 보고 돌아간 여행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어이가 없어서 웃겼겠지만, 그랬다 해도 특별한 일기 한 줄 쓸 거리는 됐겠다고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드라마 ‘도깨비’ 대사에 인용된 한 시구가 떠올랐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여기서 ‘날’이란 각종 상황을 비유한 표현이지만, 하루 동안 문자 그대로의 ‘날’이 부리는 변덕을 경험하고 보니 이 구절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뭔가 깨달은 듯했다. 나는 조금 자유로워졌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앙코르와트를 나서며.



휴가 끝나고 돌아와 사표를 낼 생각을 했었는데, ‘여행 뽕’은 역시 모르핀이었다. 돌아와서도 사표는 내지 못했다. 지금의 나보다 못한 나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 다시는 이 정도로 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늘 발목을 잡았고 이번에도 그랬다.


나보다 사나흘 더 캄보디아에 있다가 들어온다던 석과 민은 며칠 뒤 메신저를 통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씨엠립의 어느 이발소에서 민이 현지 미용사에게서 이발을 하고 있는 사진을 석이 찍어 보낸 것이었다. 몇 십분 뒤 커트가 끝난 뒤의 사진도 왔다. 예상 외로 아주 말쑥한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가 캄보디아에서 이발소에 갔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아니, 어떻게 캄보디아에서 머리를 자를 생각을 다 하셨어요? 머리 망치면 어떡하려고요?”


“그냥, 캄보디아 이발소도 체험할 겸. 한번 확 망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요. 이발사 아저씨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막 자르시길래 나카무라 되는 줄 알고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뜻밖의 횡재에 기분이 좋네요.”


‘한번 확 망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라는 말에 잠시 멍해졌다. 아, 나는 아직도 멀었다. 망할까봐 걱정하는 사람, 망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사람. 그 사이엔 얼마큼의 간격이 있는 걸까. 도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보다 생각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던 우리 선배의 잔소리 레퍼토리만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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