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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달 Nov 12. 2018

눈으로 쌓이지 못하고 눈물이 되어 스미더라도

기형도 '詩作 메모(1988.11)'


문학과지성사가 펴낸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오랜만에 다시 보려고 책을 꺼냈다가 책 뒷표지의 '시작 메모'에서부터 마음을 홀렸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형식을 찾지 못해 공중에 흩어졌다는, 그래서 쓰지 못하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는 그의 절망에 공감했다. 눈이 곤두박질치듯 내리는데 하나도 쌓이지 않았다고, 눈은 하늘에서도 지상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그는 썼다. 눈발은 그의 시심(詩心) 또는 어떤 의로움을 희구한 그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밤눈들이 언젠가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그 눈이 온전히 지상에 내려 쌓일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는 다만, '눈'이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이라고 했다.

눈으로 쌓이지 못해도 눈물로 스밀 것이라는 이 믿음이 아프고 슬프다. 그 숭고한 확신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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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쩌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많은 시가 쓰여진다. 어떤 시인은 그 안에서 희망을 길어올리고, 어떤 시인은 절망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 어떤 것이든 다 좋다. 어쨌거나 어떤 상황에서 조금 더 아파하는 사람, 조금 더 우는 사람들이 시를 쓰는 듯하다. 그리고 다시 그 시가 아프고 우는 이들의 마음을 안고 쓰다듬는다. 어떤 세상에서든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에겐 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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