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느니 일한다는 마인드로 건져 올린 기획의 서막
세 번째 출판사를 퇴사하고는 뉴욕에 한 달 머물게 되었다.
갑자기 뉴욕은 왜?
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는 출판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해외 도서전과 해외 출판사 탐방, 해외 인턴십 등 다양한 글로벌 출판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내가 지원한 분야는 뉴욕에 위치한 출판 주간지 <Publishers Weekly> 인턴십이었는데, 뉴욕 잡지사에서 한 달 동안 일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은 인턴십 공고에 주간지 도서 리뷰 작성, 마감 기사 확인, 출판사 및 서점 관계자 미팅으로 나와 있지만 내가 가기 전까지만 해도 업무 내용이 전혀 없었다. 진흥원에 전화해서 가서 뭘 하는 거냐고 물어도 자기들도 모른다고 했다. 협정을 맺었으니 "가십시오!"라고는 했는데 이게 처음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 진흥원 사람들도, 거기 잡지사 사람들도 나한테 뭘 시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뭔지 모르지만 일단 뉴욕에 갔다.
맨해튼의 동남쪽, 맨해튼에서도 특히 힙하다는 로워이스트사이드에 있는 한 에어비앤비에 짐을 풀고 32박 33일을 뉴욕에서 보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이하 PW)는 5번가와 6번가 사이 23번 스트리트에 있다. 숙소에서 회사까지는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고 5정거장 거리여서 집에서 8시 반에만 나오면 9시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전 미국 시골 지역에서 교환학생 할 때는 그렇게들 대충 입고 다녔는데, 뉴욕은 뉴욕인지 지하철에 스타일 좋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꼭 책을 읽고 있었다(편견有).
아침 9시에 출근하면 사무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한 9시 반에서 10시는 되어야 슬슬 도착했다. 잡지사 특성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저녁에 딱히 늦게 퇴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감이 있는 금요일도 마찬가지였는데, 워낙 몇십 년을 해오다 보니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사람을 갈아 넣지 않아도 되는 구조인 듯했다. 그러나 가끔 마감날 편집장한테 가보면 친절하게 대하려 애쓰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느껴졌다. 역시 마감날의 편집장의 초조함은 만국 공통인가.
점심 먹을 때는 시간을 오래 쓰지 않았다. 점심시간 1시간을 칼같이 지켰고, 그마저도 잘 안 나가고 자리에서 대충 때웠다. 회식은 없지만(PW 대표네 집에서 파티를 한 번 하긴 했다) 친한 직원들끼리는 퇴근 후 종종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나도 초대받아서 한 번 갔는데 영화 끝나고 저녁을 먹지 않고 헤어져서 조금 놀랐다. 한국이었으면 영화가 1차, 저녁이 2차, 맥주 한잔이 3차, 그리고 n차로 이어졌을 텐데(영화는 n차를 위한 핑계일 뿐).
여기서 한 달을 꽉 채워 일했다. 미국 회사 문화와 잡지사의 워킹 사이클, PW 직원들, 외부 출판사 사람들, 이런저런 에피소드 얘기만 해도 한 3회쯤은 나올 거 같은데, 그건 나중에 한번 정리하는 걸로 하고.
뉴욕에 가기 전에는 놀 생각만 가득했다. 인턴십이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라고 통보받은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짓은 뉴욕 공연 일정을 검색한 것이었다. 한국에는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무려 매일 있었고, 난 신나서 노트에 아티스트명과 공연 날짜를 빼곡히 적었다. 그래, 인생 한 번인데 다 보고 오자고 하기에는 너무 비싸서, 고르고 골라 세 아티스트의 공연을 예매했다.
그런데... 애초에 정한 인턴십 날짜를 PW 측에서 최종 확정을 안 해줘서 나도 진흥원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출발 예정 일주일 전까지도 PW에서는 확답을 주지 않았고, 나는 진흥원 담당자를 엄청나게 쪼았다(이 모든 게 예매한 공연 때문이란 건 몰랐을 터...). 그러다 일주일도 안 남겨놓고 7월 중순으로 인턴십 날짜가 연기되었다. 그리하여 6월에 있는 가장 비싼 두 공연(각각 20만 원이 넘음)을 날렸다.
이 나라는 희한한 게, 공연 티켓을 구매하면 환불이 안 된다. 대신 티켓을 살 때 환불하고 싶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놔야 하는데 그 값이 몇십 달러다. 당연히 구매 시 보험은 들지 않았기에 눈물을 흘리며 중고 티켓 판매 사이트에 매물로 내놨다. 하지만 누구도 1장만 구매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40달러까지 후려쳐서 내놨지만 아무도 건들지 않았고, 그날 공연장에서 누군가 자기 가방 자리로 쓰지 않았을까...
그렇게 미리 나댄 죄로 돈을 날리고는 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죄책감 + 빈곤함=자숙)
그리고 10년 전에 뉴욕에 한번 가서 웬만한 관광지는 돌아봤기에 별로 생각이 없기도 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올라가서 찍은 사진은 아직 컴퓨터에 있고, 자유의 여신상 유람선 투어 해봐야 그 주변 몇 번 뱅글뱅글 돌다가 끝날 거고, 타임스퀘어는 사람만 겁나 많고... 딱히 또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그러나 10년 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반스 앤 노블은 다시 가보고 싶었다. 당시 우연히 들어간 이 대형서점은 깨끗하고 넓은 매장에 수많은 책이 있고 군데군데 편한 쇼피가 비치돼 있었으며, 커피숍도 있어 따뜻한 차 한잔 하기에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들뜬 분위기가 가득해 더 좋았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반스 앤 노블 유니언스퀘어 지점에 들어갔을 때, 어 이 느낌이 아니었는데 싶었다. 책이 너무 많고 정리가 안 되어 난잡해 보였다. 책이 엉망으로 쌓여 있는 건 아니지만 대중없이 아무 책꽂이에 막 꽂아놓은 것 같았다. 이 거대한 양의 책이 갑갑하게 들어차 있으니 처음부터 질리는 느낌이었다. 어느 코너부터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공간 군데군데에는 맥락도 없이 장난감과 인형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마치 예전에 살던 미국 시골 동네의 월마트 같았다. 매대 곳곳에는 반값 할인 도서들의 가격을 적은 패널이 삐죽삐죽 꽂혀 있었다. 도서 검색 컴퓨터는 고장 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크고, 많고, 낡고, 난잡했다. 그리고 재미가 없었다. 이 비싼 뉴욕 땅에 이렇게 넓은 서점을 이렇게 운영해도 적자가 안 나려나?
반면, 숙소 근처 서점인 마스트 북스는 좀 독특했다. 간판도 딱히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조그만 서점이었는데, 들어가니 책이 많지 않지만 한 권 한 권이 흥미로워 보였다. 문학, 예술, 독립출판물, SF 고서적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잘 보이게 진열되어 있었다. 작은 서점이지만 볼 게 많아서 한참 머물렀는데, 사람들이 계속 들어와서 책을 한 권씩 사갔다.
그래,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렇게 가볍게, 그리고 전문성을 내세워 장사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 임대료도 적게 들어가면서 재고 부담도 적고. 또 이런 서점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인터넷으로 뉴욕의 작은 서점들을 검색했다. 한때 뉴욕의 거리를 가득 채웠던 서점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 살아남은 서점들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난 이 '진짜 쎈 서점'들의 비결을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 조직이나 자본에 기대지 않고 홀로 해낼 수 있는지.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비결을 배우고 싶었다.
마스트 북스와 반스 앤 노블을 1:1 비교하면 어디 기고글로 딱이다. 하지만 이를 넘어 독립된 콘텐츠로서 존재 의미를 가지려면 그보다 많은 사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내친김에 다 가보기로 했다. 20군데? 30군데? 50군데?!
... 나는 뉴욕에 딱 한 달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매일 출근해야 한다(잊을 뻔). 아무리 욕심 많고 열심히 산다지만 퇴근하고 저녁도 먹어야 하고 주말에는 센트럴 파크도 가야 하고, 무엇보다 여름이라 더워 죽겠는데 매일 두세 군데씩 뛰어다니며 취재할 수는 없었다. 인터뷰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래서 꼭 가봐야 할 독립서점을 <타임아웃 뉴욕>과 PW 젊은 직원들한테 물어봐서 리스트를 확정했고, 동선별로 정리해 본격 취재에 나섰다.
최종적으로 19개의 독립서점과 4개의 대형서점을 방문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서로 컨셉이 겹치거나 스타일이 비슷한 독립서점은 하나도 없고, 서점마다 주인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났다. 책 큐레이션도 각자의 컨셉과 전문성에 맞춰 충실히 이뤄졌다. 취급하는 상품은 책이지만, 과연 같은 상품을 파는 곳인가 의심될 정도로 각자의 스타일이 다양했다.
독립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에 대해 무척 자부심을 느끼는 듯 보였고, 책이 안 팔릴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없었다(속마음은 모르겠지만). 무엇보다도 굉장히 과감했다. 이것저것 좋아 보이는 걸 조금씩 갖다 놓고 손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주인이 지향하는 바를 확실하게 밀고 나간다는 느낌이었다. 인터뷰할 때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망할 땐 망하더라도 원칙을 지킨다는 마인드와 책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또한 부수적으로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굿즈나 식음료 등)는 각자 달랐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책을 액세서리화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책을 파는 척하면서 사실 책은 분위기를 위한 매개체고 매출은 다른 걸로 올리고자 하는 꼼수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건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많이 사는 뉴욕 사람들 덕분에 가능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본질에 충실한 운영이 이들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다.
자, 취재는 다했으니 이제 콘텐츠로 엮어내야지.
사실 이 기획을 하고 취재를 시작하기 전부터 염두에 둔 매체가 있었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3일 전, 그 매체에 기획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