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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잡지사에서 뉴욕 독립서점까지 2편

100일 동안 앉아서 꾸역꾸역 쓰다 보면 책 한 권이 된다

by watabook

*퍼블리(publy.co)에서 발행한 <I♥NY 독립서점>이나 왓어북 출판사에서 종이책으로 출간한 <다녀왔습니다 뉴욕 독립서점>을 먼저 보시면 좋습니다.


내가 퍼블리라는 플랫폼을 알게 된 건 2017년, 퇴사를 앞뒀을 때다.


선배 혹시 퍼블리 알아요?


뉴욕 인턴십을 앞두고 회사 후배를 만났는데, 곧 퇴사할 거라 말하니 문득 퍼블리라는 회사가 왠지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휴대폰으로 찾아보니 <퇴사 준비생의 도쿄> 리포트를 출간한 그 플랫폼이었다. 여기구나! 예전에 <퇴사 준비생의 도쿄> 리포트를 접했을 때 이 기획이 신박하다고 생각했다. 퇴사 후 창업 아이템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데다, 단순한 여행이 아닌 목적이 있는 탐방을 간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퍼블리의 콘텐츠 제작 과정도 솔깃했다. 미리 기획을 선보이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확실한 수요를 확인한 후, 그때부터 리포트를 써서 발행하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콘텐츠를 만든 다음 실패하는 케이스가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퍼블리는 최소한의 자금을 확보한 후 시작하기 때문에 저자에게도, 회사에게도 부담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뉴욕의 서점들을 돌아보니, 문득 퍼블리에서 이 기획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독립서점의 운영 방식을 포함해 뉴욕이라는 도시의 브랜드와 한국에도 특색 있는 서점들이 들어서는 트렌드를 보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슥슥 기획안을 작성해 귀국 3일 전 퍼블리에 제출했고, 승인되어 기획을 런칭하게 되었다.



글 콘텐츠 기획하기


개인적으로 책을 기획할 때, 카테고리별로 세 항목 중 하나를 충분히 만족시키는가를 중점적으로 본다.


재미: 흠뻑 빠져서 읽을 수 있는가?(소설 등)

위로: 읽었을 때 감성적 충족을 얻을 수 있는가?(에세이, 시 등)

지식: 실용적인 기술이나 지식 및 통찰을 얻을 수 있는가?(경제경영, 실용서 등)


이 세 항목은 배타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 집중해야 한다. 물론 재미도 있으면서 위로도 되고, 실용적 지식을 얻으면서도 감성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하나에 중점을 두고 하나는 부차적으로 따라와야지, 둘 다 똑같이 노리면 이도 저도 아닌 콘텐츠가 된다. 즉 욕심을 너무 부리면 혼탁하고 걍 그런 책이 된다. 독자가 애초에 기대했던 한 지점을 충실히 채워줘야 한다.


대조적으로 반드시 갖춰야 하는 두 항목이 있다. 바로 시의적절성과 메시지의 명확성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너무 이른 논의이거나 반대로 뒷북치는 이야기면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 쉽다. 한 마디로 '왜 지금 이걸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확실히 제시해야 한다. 또한 이 얘기 저 얘기 다 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읽는 사람이 정신없지 않게, 한 방향으로 천천히, 하지만 단호히 끌고 가는 게 필요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저자가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이는 내가 책을 만들면서 스스로 깨닫거나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들이 해준 조언 중 내 것으로 소화한 원칙들이다. 물론 이런 체크리스트를 신념처럼 꼭 붙들고 작업하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면 이에 맞춰 편집하려고 노력한다. 이번 글쓰기에서도 이를 각별히 신경쓰기로 했다.



이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큰 줄기는 하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였다.


우선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 있는 작고 강한 조직이 점점 더 유리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망할 일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던 첫 회사가 몇 년 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큰 조직=안정적이라는 공식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라는 걸 목격했다. 한때 연 8조 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자랑했던 회사지만, 시대 변화, 경기 불황, 타이밍 미스로 인한 부채 비용 증가, 정치권 상황 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믿을 수 없는 마지막을 맞은 것이다.


사실 자본이 많은 게 왜 단점이겠는가. 큰 자본을 가진 조직은 여러 모로 유리하다. 하지만 자본만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만으로는 쉽지 않고, 큰 자본에 수반되는 많은 것들이 조직의 혁신과 변화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에 더해, 대도시에서 흥하는 작은 가게의 전략을 다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서점도 상업 공간이다. 마진율이 낮은 책이라는 상품을 팔아 가장 경쟁이 빡센 도시에서 승승장구하는 가게들을 들여다보면 한국의 자영업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홀로 독야청청 살아남는 법'을 공유하고 싶었다. 나 자신과 허구한 날 퇴사 생각만 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나름 사회생활 9년 차, 세상의 거친 풍파를 막아주는 조직의 고마움을 알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회사를 나와야 하고, 그때를 위해 조금씩 준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공간, 경험, 큐레이션의 관점으로

분석한 뉴욕 독립서점


서점을 스무 개 넘게 다니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 서점은 어떻고 저 서점은 어떻고 지루하게 풀어놓는 건 별로였다. 어쨌든 전하려는 메시지가 확실한 글이니까. 고민 끝에 이들의 전략을 집약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를 정했다. 바로 공간, 경험, 큐레이션이다.


1. 공간


뉴욕의 서점들은 공간을 무척 매력적으로 꾸민다. 평당 임대료가 서울은 저리 가라 할 만큼 높은 맨해튼에서 넓은 공간을 운영하는 서점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서점들은 물리적인 공간이 넓든 좁든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을 허락된 공간 안에 한껏 녹여냈다. 책을 작품처럼 진열해 갤러리 분위기를 내거나 1970년대 미국 부엌을 컨셉으로 꾸민 곳도 있고, 어떤 서점은 층고가 높은 복층식 구조로 오래된 대학 도서관처럼 만들었다.


중요한 건 주인의 미적 감각뿐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에 충실히 맞는 공간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브루클린의 조용한 동네에 있는 몰래시스 북스는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책을 구비하는 대신 술 마실 수 있는 바를 설치해, 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동네 힙스터들의 아지트 역할을 한다. 어린이 도서 전문 서점 북스 오브 원더는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도록 바닥에 카펫을 깔아놓고, 한쪽 공간에는 어른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오래된 일러스트 포스터를 전시해놓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브루클린 덤보에 위치한 파워하우스 아레나는 넓은 공간을 갤러리처럼 사용한다. 천장에 달린 미러볼이 살롱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분류 상관없이 예쁜 책만 모아놓은 듯한 평대
직원 추천 도서들
저녁에 있을 북토크를 기다리는 곰돌이


2. 경험


'경험' 키워드에는 고객들을 위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설명했다. 최근 한국의 독립서점들이 그러하듯 뉴욕 서점들도 고객을 위한 즐거운 이벤트를 많이 운영한다. 사회 문제에 관심 많은 서점 블루스타킹스에서는 성소수자를 위한 토론회와 요가 및 호신술 워크숍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100년 전통 공연 예술 전문 서점인 드라마 북숍에서는 공연예술계 종사자를 위한 강좌가 열린다.


서점 열 곳에서는 주인이나 직원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그중 직원에게 가장 오랫동안 꼬치꼬치 뭔가를 캐물은 아이들와일드의 경우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수업을 운영한다. 넓지 않은 공간 한켠에 강의실을 마련해 언어 수업을 진행하는 건 전직 UN 직원인 이곳 주인의 관심사 때문이 아닌가 한다(물론 이로 인한 수익도 꽤 된다고 한다). 생각보다 미국인들은 다른 문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해외 문학과 여행서를 주로 판매하는 이 서점 주인의 뚝심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배워보아요."
언어 수업이 이뤄지는 작은 강의실


3. 큐레이션


사실 큐레이션이 오프라인 서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해에도 엄청나게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걸 다 들여놓을 수 없으니, 좋은 책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하는 안목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뉴욕의 서점들은 자기 방식대로 책을 큐레이션 하는데, 어떤 서점은 아예 한 가지 분야(어린이책, 여행서, 요리책, 시 등)에 집중하기도 하고, 일반 서적을 판매하지만 자신의 취향이나 철학에 맞춘 큐레이션을 추구하는 곳들도 있다.


그중 큐레이션이 가장 돋보인 곳은 브루클린에 위치한 헌책방인 휴먼 릴레이션스였다. 헌책으로 이런 큐레이션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헌책방이라고 하면 천장까지 쌓여 있는 책더미를 간신히 지나다니며 정처 없이 헤매는, 득템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보물 찾기와 같다. 그러나 이곳은 분류별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원하는 책을 딱 찾을 수 있고, 저자별로 모아놓거나 추천 책 아래에 메모를 붙여 놓는 등 일반 서점 못지않게 신경을 쓴다. 저렴하면서도 상태가 좋고, 읽을 만한 책들이 있으니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책"
서재로 만든 작은 방이 있는 독특한 구조
직원이 손글씨로 써 놓은 추천 문구. "Read it now!"


이렇게 23개의 서점을 다녀온 긴긴 이야기를 원고지 800매가량의 콘텐츠로 풀어냈다.



생전 글 안 쓰던 사람이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기까지


단시간에, 한 번도 호흡이 긴 글을 써보지 않은 내가 어떻게 원고지 800매가량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을까? 아마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고, 이를 체계화하는 키워드를 이용했으며, 그리고 펀딩 받은 448만 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퍼블리의 능력 있는 PM과 에디터 덕도 많이 봤다.


또 하나 더하자면 꾸역꾸역 할 수밖에 없는 '절실함'이었다. 글쓰기가 본격적인 궤도 위에 올라가면서부터는 회사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으니까. 결과가 어찌 됐든 이걸 완성해야 그다음 스테이지가 열릴 것 같았다.


오전 10시에 작업실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고, 사람들과 수다를 좀 떨다가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을 먹고, 잘 써지면 오후 4시, 잘 안 써지면 5시까지 작업했다. 당시 이용하던 작업실이 카페도 겸해서, 자리에서 일하다 안 되면 카페 테이블에서도 쓰고, 야외 캠핑 의자에 앉아서도 쓰고, 집에 와서 한숨 자고 또 쓰기도 했다.


끝까지 함께해준 4kg짜리 노트북


중요한 건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는 것. 잘 되든 안 되든 일단 뭐라도 썼다. 그렇게 맨날맨날 괴로워하면서 쓰다 보니 어느 날 딱 끝났다. 신기했다.


리포트가 발행되고 독자와의 만남 행사도 잘 마쳤다. 얼마 만에 느끼는 평온함인가.


그때 나는 누워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론 '힘들었고, 괴로웠고, 다시는 쓰지 말자' 이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평온함을 비집고 올라온 건 또다시 나를 착취할 몹쓸 생각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썼는데,
리포트 하나로 끝내면 아깝잖아?
종이책으로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 나도 모르게, 그러나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1인 출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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