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고생길(?)의 시작
1인출판은 내게 사업이라기보다는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아래와 같은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목적인.
남의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서,
내가 만든 회사에 직원을 고용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궁금하면 해보면 되지 않겠니? 수중에는 4백만 원이 있었다. 디자인비와 제작비를 충당하지도 못할 돈이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살짝 잽을 날려보고 괜찮으면 다음 책도 내지 뭐. 영 아니다 싶으면 접고 다른 거 찾아봐야지.
어차피 잃어봐야 4백만 원이라는 생각으로, 대책 없이 1인출판사를 시작했다.
사실 출판사 이름을 못 정해서 시작도 못할 뻔했다. 이름 짓는 게 너무 어려웠다. 처음 생각한 몇 개는 좀 별로였다.
와이북스: 내 이름의 앞글자 Y를 따서 짓자->이미 존재하는 출판사
베이루트: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된 도시 베이루트처럼 다양한 지식의 융합-> 너.. 너무 심오한가?
블랙버드: 비틀스의 좋은 노래! ->근데 등산복 입고 산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분.(블랙야크?)
고고돌핀: 돌고래처럼 똑똑한 책을 만들겠다-> 발음도 번거롭고, 줄여 부르면 '고돌'인데 고도리..?
미어캣: 기민하게 변화를 감지하며 책을 만들자는 뜻 ->이미 존재하는 출판사
생각한 건 더 있었는데, 출판사인쇄사 검색시스템에서 찾아보니 웬만한 이름은 다 있었다. 여기에서 검색되는 출판사만 6만 8천 개가 넘는데(관리가 안 돼서 중복으로 나오는 것도 많은 듯) 내가 생각한 이름이 없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물론 소재지가 다르면 같은 이름의 출판사를 내는 것도 가능하고 적당히 변형해 정하는 방법도 있다.(예를 들어 와이북스의 경우 와이 북스 / 와 이북스 / 와이와이북스 이런 식으로 변형)
아무튼 고민 끝에 '한 권의 책이 할 수 있는 일(what a book can do)'에서 착안해 왓어북이라고 결정했다. 왓어북.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열 명 중 세 명은 왔어북이라고 발음한다.
(여보세요? 와써북이죠?)
출판업은 등록제다. 간단한 서류를 들고 구청에서 신고를 하면 금방 끝난다. 물론 책을 독립서점에서만 판매하겠다 하면 굳이 출판등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나는 상업출판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출판등록은 필수였고, 등록세 명목으로 한 3만 원 좀 안되는 돈을 납부했다.
출판사 신고확인증이 나온 후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등록을 마쳤다. 이것도 어렵지 않았지만 몇 달 후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다. 출판업은 면세 사업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세금을 내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식의 흐름대로 면세사업자로 신청했다. 그러나 그 면세라는 것은 세금을 안 내는 게 아니라 부가세 신고 의무가 없다는 거지, 세금을 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딱 책만 판매하면 면세사업자를 하는 게 낫지만 나는 몇 가지 사정을 고려해 중간에 일반과세자로 변경했는데, 이후 과정이 복잡했다.
우선 일반사업자로 변경하면서 사업자번호가 바뀌었다. 그리하여 엄밀히 말해 폐업은 아니지만 시스템상으로는 폐업 처리가 되었고, 은행에서 사업자 통장을 재발급받으면서 폐업이 아니란 걸 증명하려 세무서를 왔다 갔다 했다. 또한 거래를 튼 서점마다 사업자등록증을 다시 보내고 수정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고, 세무서에 부가세신고와 면세사업장 현황 신고를 각각 했다.
게다가 나중에 매출 증빙에도 애를 먹었다. 일반사업자로서 책을 팔아서 매출이 일어나도, 책은 면세 상품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준에 맞춰 매출 증빙서류(부가세증명원 등)를 뽑아보면 매출액이 0원에 수렴하는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면 매출로 안 잡히니 소득세 신고를 할 때 유리하지 않느냐? 그건 또 아니다. 소득으로는 잡히니까. 암튼 이런 자잘한 일이 자꾸 괴롭힌다. 부디 미리 정보를 샅샅이 파악하고 시작하시길...
출판사의 핵심, 책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회사에서 하던 일이고, 당시 퍼블리의 PM과 에디터가 손봐줬으므로 고칠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콘텐츠가 아닌 종이책으로 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작업이 더 필요했다.
책 한 권은 몇 페이지가 적당할까?
아마 책의 주제나 내용, 컨셉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적어도 300페이지는 되어야 한다고 봤다. "나 뉴욕 서점 댕겨왔다"는 단순한 탐방기라면 모를까 의미 있는 정보와 인사이트를 전달하는데 분량이 적으면 가치가 떨어질 듯했고, 스물세 곳에 달하는 서점을 짧게 짧게 훑고 지나가기에는 각 서점마다 할 말이 많았다. 그래서 각 서점별로 글을 조금씩 붙여 분량을 늘렸다.
뉴욕에서 한 달 동안 다닌 맛집과 갖가지 놀거리도 추가로 넣을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것도 개인 취향이긴 한데 아무리 내용이 재밌어도 주제에 딱 맞지 않는 썰을 넣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인터넷 플랫폼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확실한 목적이 있는 책에는 관련된 내용만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디지털 리포트에 들어간 쓸데없는 말을 다 덜어낸 후 원고를 다시 마감했다.
약간의 재미를 더하려 각 파트의 첫 장에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사진을 배치했다. 매장에서 판매하는 티셔츠, 근사한 입간판, 1달러짜리 헌책 가판대, 서점 앞에서 벌어진 트럼프 반대 시위 현장까지, 책과 공간이라는 주제를 초월해 약간은 낯설지만 재밌는 사진을 골라 넣었다. 얼마나 많은 독자가 이를 눈여겨봤는지는 모르겠다.
책의 구성은 3부로 나눴다. 1부에서는 '뉴욕의 강력한 독립서점'이라는 제목으로 열 곳의 하이라이트 서점을 하나씩 소개한 후 각 서점 직원의 인터뷰를 실었다. 2부에서는 서로 비슷한 느낌의 서점끼리 묶어 '독립서점 vs. 독립서점'으로 비교했고, 3부 '한번 가보자, 기업형 체인 서점'에서는 아마존과 반스 앤 노블 등 대형서점을 소개했다. 전반적으로 19개의 독립서점의 운영 방식과 철학에 집중했고, 4개의 대형 서점은 둘러본 감상 정도로 정리했다. 그러나 반스 앤 노블 편에는 비판적인 의견을 좀 곁들였다.
각각의 꼭지는 직관적인 구조로 구성했다. '서점의 역사-공간 특징-책 큐레이션-커뮤니티로서의 역할-요약 및 결론'의 흐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좀 자잘해 보일 수 있는 19개의 꼭지를 예측 가능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어 덜 부담스럽고, 각 꼭지가 독립적으로 완결되므로 아무 데나 먼저 펴서, 혹은 마음에 드는 꼭지만 읽어도 상관없도록 했다.
혼자서 여러 번 교정교열을 봤지만 최종교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신입 시절, 나름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자신 있다면서 교정지에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체크했는데, 사수가 빨간펜을 들고 첫 장부터 내가 빼먹은 오탈자와 띄어쓰기를 시뻘겋게 표시해서 돌려주는 줬을 때 받은 충격이란...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아직도 빼먹는 게 심심찮게 있고, 특히 내가 쓴 글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편집 잘하는 두 편집자에게 교열 의뢰를 맡겼다. 이들은 역시나 크고 작은 실수를 잡아냈다. 열 번을 봐도 안 보이는 건 죽어도 안 보인다는 교열의 무서움이려니... 이 두 분은 날 딱히 여겨 304쪽짜리 책 교열 작업을 태국 음식 얻어먹는 걸로 퉁쳤다. 이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잊지 않을 감사한 도움이다.
책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지인이 한 디자이너를 소개해줬다. 메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직접 만나 슬슬 작업을 해보니 글쎄 실력, 인품, 스피드, 예술성 모두 갖춘 비현실적인(!) 분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출판사에서 일할 때는 도와줄 사람들, 혹은 도와주지 않아도 의견을 물을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혼자였다. 이럴 때 이런 실력 있는 파트너를 만나면 그렇게 힘이 된다.
디자이너에게 원고와 전체 컨셉을 전달하며 표지와 내지 디자인을 의뢰했고, 이에 맞춘 몇 종류의 시안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표지는 무조건 예쁘게 만들면 좋다고 생각하곤 한다. 나 또한 책을 만들어보기 전까지는 표지 디자인이 가장 중요한 줄 알았다. 하지만 표지가 예쁘다고 해서 그 책을 사느냐? 간혹 그럴 수는 있지만 보통은 아니다. 표지는 무엇보다 책이라는 '상품'의 정체성을 제대로 나타내야 한다. 표지는 때로는 예뻐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예쁘면 안 될 경우도 있다. 제목을 쓴 폰트가 귀여워야 할 때가 있고, (나무에게 미안하지만) 띠지를 꼭 둘러야 할 때가 있다.
디자이너는 컨셉이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표지 시안을 제시했다. 두 종류 다 한눈에 좋았다. A시안의 키워드는 '책 & 서점'이고 B시안은 '뉴욕 & 공간으로서의 서점'으로 보였다. 상품 컨셉으로 보자면 A시안은 작은 서점에 진열되면 돋보일 것 같고 B시안은 대형 서점의 평대에 어울릴 만했다. 이 책이 확고한 취향을 가진 소수보다는 조금 더 확장된 독자에게 가 닿길 원했으므로 B시안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꼼꼼히 만든 pdf파일은 하나의 책으로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