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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선하는 착한 아이들

전에 없던 모험이 시작됐다

by watabook

퇴사를 결심하던 날을 기억한다. 5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 여의도역 3번 출구를 나와 회사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이어폰에서는 언니네이발관 <보통의 존재> 앨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사 한 소절이 귀에 꽂혔다.


알 수 없는 세상이 나에게 너는 아무도 아니라고

믿을 수 없는 말을 나에게 해봐도

난 절대로 믿을 수 없어 인정할 수가 없네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아무도 아니래.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게 그다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매일 재미도 없는 회사를 20년 넘게 다녀야 하는 모두와 같은 운명에 당첨됐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남들 따라 설레는 맘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는데, 깜깜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끝없이 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란. 인생에 폐소공포증이 올 지경이었다.



다른 세상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난 성인이 되어서도 인생 경로를 사회적 기준에 맞췄다. 대학에 입학하고 노느라 바쁜 와중에도 취업이 잘되는 경영학으로 전공을 정하고 남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스펙을 야무지게 갖췄다. 재수강으로 학점도 바짝 끌어올려, 취업 시즌엔 죽네사네 하면서도 결국 취업에 성공했다.


평생 부모님은 내게 공부하라고 하거나 무슨 직업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트랙을 착실히 걸어갔다. 일탈이라고는 밤새 술 마시고 놀거나 혼자 해외여행 간 게 전부였다. 주어진 길을 벗어난 적 없고, 조금이라도 흠이 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인생이었다. 그렇게 남들이 가는 길을 열심히 걸어가면 좋은 날이 올 줄 알았던 것 같다. 모든 미션을 클리어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가보니, 견딜 수 없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트랙이 끝없이 뻗어 있었다.


결국 얼마 후, 난 참지 못하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무섭지만 일단 탈선해보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기 전에. 누군가는 내게 용기가 대단하다고 했지만 난 그 트랙을 계속 가는 데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승산이 현저히 떨어지는 모험일지라도, 앞으로 내 인생이 이렇지 않았으면 했다. 다른 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만약 없더라도 내 눈으로 없다는 걸 확인해야만 했다.



나와 함께 세상에 외칠 작가를 찾다


그로부터 7년 후, 1인출판사를 운영 중이었다(거까지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전 글 참조). 어느 날, 브런치북 프로젝트 응모작을 검토하다 한 작품을 발견했다. <소상공인 탈선일기>는 내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탈선'이라니! 이 작품은 그 시절 나와 비슷한 고민, 열정, 퇴사 사유를 담은 데다가 작가가 2년 7개월 만에 첫 회사를 퇴사한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탈선 후 내 선택이 출판업이었던 반면 작가의 선택은 마트업이었다. 퇴사하고 동네 마트를 창업한 거다. 게다가 군산까지 내려가서.


글이 너무 재밌었다. 꽤 많은 꼭지가 있었지만 세 번 정독했다. 처음에는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절과 의식의 흐름에 깔깔대며 봤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일하다가 퇴사하고, 세상물정 모르고 사업에 뛰어들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에 대해 공감하며 봤다(나도 손익계산 제대로 안 하고 시작해서 초반에 고생함...). 그리고 꼭 전망 좋고 멋진 스타트업이 아닌 전통적인 자영업이라도 스마트하게 운영하면 스타트업 못지않게 멋지다는 걸 알았다.


글을 세 번째 읽고 나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자라 부모님 속 한 번 안 썩이고, 적당히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내다가 회사에 입사해 매일 울상으로 출퇴근하는 지인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 몇몇은 퇴사 후 상상도 못 했던 길로 여기저기 흩어졌다. 분명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불안정한 길이지만,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꿋꿋이 나아가고 있었다.



김사원은 왜 엑셀을 그만두고 군산에서 마트를 열었을까?


경욱 작가의 작품을 브런치북 프로젝트 수상작으로 선택한 이유는 과거의 나와 현재 젊은 세대에게 이 이야기를 반드시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치 살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큰일 나지 않더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특히 모두가 서울로 갈 때 거꾸로 군산으로 가고, 모바일 쇼핑이 치고 올라오는데 왜 하필 동네 마트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군산에서 마트 하면 외않되?”라고 말하고 싶었다. 단, 이에는 고통과 좌절, 피나는 노력, 그리고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함께 알려주고 싶었다. 뭘 하든 상관없지만 하려면 '정말 잘해야 한다'는 것도.


경욱 작가와 나는 대학 졸업 후 2년 7개월까지 거의 같은 트랙을 뛰었다. 그러다가 둘 다 이 트랙에서 탈선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력질주했다. 양쪽으로 갈라진 길이었기에 아마 우리는 평생 만날 일이 없었을 거다. 그런데 몇 년 후 우리는 우연찮게 ‘브런치’라는 교차 지점에서 만났다. 그러고는 과거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지금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힘을 합해 <이렇게 된 이상 마트로 간다: 엑셀만 하던 대기업 김 사원, 왜 마트를 창업했을까?>를 만들었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경욱 작가에게도 난생처음 하는 이 모험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안전한 길보다 내가 직접 만들어가는 길이 더 값지고 행복하다는 걸 안다. 나도 이 책을 편집하면서 많이 배웠고, 지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을 묵묵히 가기 위해 '끝까지 해내는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여태껏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길을 따라왔지만 진짜 정답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조심스럽게 트랙 밖으로 살짝 발을 내딛는 세상 모든 남 대리에게 이 책을 선사한다.(남 대리가 누군지 궁금하면 클릭!)


p.s. 경욱 님과 브런치 팀 모두 고생 많았어요. 막걸리 마시면서 파티해야 된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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