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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Mar 29. 2022

글 쓰는 자리

그저 쓸 뿐이다


  불과 5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쉬지 않고 재촉해대는 커서가 어찌나 싫던지. 백지를 채워야만 한다는 압박이 마중 나오면, 빈 곳간마냥 허전한 머릿속을 헤매며 쌀 한 톨이라도 건지려 구석구석을 살피는 궁핍한 아낙이라도 된 듯한, 그 기분이 참 좋지가 않았다. 글감과 언어의 빈곤은 그런 것이었다. 가진 것이 없어 그토록 작고 초라해지는 것이었다. 머리를 쥐어짜 내며 무엇이라도 쓰는 밤에는 홀가분했다. 비록 다음 날 아침, 간 밤에 쓴 글을 읽고는 다시 우울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도대체 왜 내게는 그들과 같은 글이 나오지 않는 걸까?'      



  글 쓰는 사람마다 자신의 글에 내어준 시간과 그 온도가 다를 터이니 물어 무엇하겠냐마는. 그즈음의 나는 다른 작가들의 문장과 단어와 감성과 통찰이 한없이 부러웠고, 또 그만큼 작아지길 반복했다. 특히나 비슷한 또래의 문인들이 쓴 글을 접할 때는 그들의 글을 엄청나게 질투하기도 했다. 숨 쉬듯 써 내려간 문장들에 나는 부끄러워졌다. 괜스레 서른여덟 인생을 헛살았다는 허탈함도 들었다. ‘왜 진작 쓰지 않았는지, 왜 이제야 시도하게 된 건지’하는, 의미도 없고 남는 것도 없는 원망과 후회가 또 하루치의 한숨을 채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날을 잡아 반 아이들 전체를 대상으로 롤링페이퍼 데이를 운영했다. 예비 수험생의 멘탈 관리 차원에서 진행된 이벤트였는데, 방법은 이랬다. 각자의 이름이 적힌 서류파일을 나눠주고 최근 자신의 근황이나 고민거리, 기분 상태를 적어 한 방향으로 파일을 돌리고, 서로에게 해주고픈 말을 적어 다음 친구에게 넘기길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내내 파일을 주고받다 보면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이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뜻하지 않은 관심에 괜히 우쭐해지기도, 간간히 섞여있는 친구들의 진정성 있는 응원과 격려에 울컥이기도 했던 날. 그날만큼은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한껏 어깨가 올라갔다. 별 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마무리는 항상 담임선생님의 몫이었다. 롤링페이퍼 데이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담임선생님의 코멘트로 마무리된 파일을 다시 받아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내 파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모든 것은 천천히 이뤄진단다.’          







  조바심을 버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곤 커서가 깜박이는 익숙한 하얀 백지 창을 연다. 무엇이든 적어보자는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쓰고 싶은 것이 있어도, 쓰고 싶은 것이 없어도 그냥 써 본다. 생각은 잠시 물려두고, 그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기로 한다. 거창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저 쓰는 게 좋고, 쓰면서 평안을 찾는 류의 사람일 뿐이다.      



  그래, 이제라도 시작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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