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모든 일상을 게걸스레 집어삼키던 2020년의 어느 봄날, 할머니의 부고가 전해졌다. 할머니가 머물고 계시던 요양병원 담당의사가 이미 하루 전에 할머니의 위독함을 알리고,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게 조치해 준 덕분에, 할머니는 서울 큰 아버지가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향년 98세, 고난과 억척으로 새겨진 한 세기를 뒤로하고, 할머니는 봄날의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에게는 5남 2녀의 자녀가 있으셨다. 그 가운데 쌍둥이였던 첫째 큰아버지 한 분과 아마도 셋째였을 고모 한 분이 어린 시절 유명을 달리하셨기 때문에 결국 남겨진 건 4남 1녀였다. 어른들께 듣기로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광산업으로 꽤나 많은 돈을 모으셨는데, 저녁에 할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끌러놓은 가방을 할머니가 받고 나면 이후로 밤이 늦을 때까지 초롱불 아래서 현금을 세느라 힘이 부친 날이 꽤 많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화폐개혁이 시작되었고 그간 할아버지가 모은 돈은 모두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설상가상 광산도 사기를 당해 빼앗겼고, 당연하게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졌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을에서 제법 떵떵거렸을 할머니는 이후 궂은 일도 없어서 못하는 고된 삶을 살게 되셨다. 할아버지는 사업이 망한 뒤 매일을 술로 보내다가 결국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막내인 우리 아빠의 나이 고작 15살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매우 고집 세고 독단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분이셨는데, 화가 많고 의심이 많아서 가까이하기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버거운 분이셨다. 아마도 일찍이 남편을 잃고 다섯이나 되는 자녀를 홀로 키우는 삶이 만든 흔적이 아니었겠는가. 조심스럽게 추측할 따름이다. 아무튼 이 자존심 강한 할머니는 홀로 다섯 남매를 키워내고 모두 시집 장가를 보냈다. 그 이후로 자식 손주를 보며 평탄히 사셨으면 좋았으련만, 당신께서도 버거우셨을 그 성정으로 인해 일찍이 며느리 모두와 척을 지셨기에, 그리 편안한 노년을 보내시진 못하셨다.
큰아버지들과 고모 모두 다른 지역에 살고 계신 이유로 막내아들은 결혼 후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없는 형편에 따로 분가하기도 부담됐겠지만, 홀로 남은 어머니가 마음에 밟히기도 했으리라. 아무튼 부모님은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나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이후 다섯 살이 되어 아빠의 직장 이직으로 분가를 하기 전까지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왠지 모르게 항상 화가 나 있었다. 짜증 섞인, '누구라도 걸리기만 해 봐라'는 식의 남을 책망하는 듯한 특유의 말투와 도대체 웃을 수는 있는지 궁금해지는 굳은 표정, 라면 가락처럼 꼬불거리는 짧은 머리카락과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손가락에 항상 끼고 있던 알 굵은 자주색 반지, 그리고 독한 담배냄새. 할머니는 재미없고 무서운 분이었지만, 다섯 살 평생 함께 살을 맞대고 산 정이 있어서 인지 그래도 나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나중에 다 크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엄마는 지금도 치가 떨리도록 모진 시집살이를 겪었다고 한다. 형제들이 다른 지역에 살기도 했고, 할머니의 성정이 대단하기도 했는지라, 엄마의 손윗동서들은 당시에도 할머니와 전혀 살가운 관계가 아니었다. 모두가 흩어지고 할머니 곁에 남은 막내 덕분에 엄마는 그 모든 시집살이를 홀로 묵묵히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엄마가 치를 떠는 일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갓난아이 시절부터 매일 아침이면 낚아 채이 듯 할머니 등에 업혀 함께 마실을 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등에 업혀 집을 나가고 나면 종일 담배연기 가득한 너구리 굴 같은 골방 구석에 누워있을 걸 알아서였다. 할머니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동네 할머니들과 화투패를 매만지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다 아이가 울라치면 담배를 물고 있던 입으로 음식을 꼭꼭 씹어 누워있는 아기 입에 쑥 밀어 넣고는 했다. 엄마는 할머니 등에 업혀가는 나를 볼 때마다 타는 속을 어찌 진정시킬 수가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고 한다. 이제와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당시 할머니 곁에서 담배연기만 덜 맡았어도 지금쯤이면 훨씬 똑똑하고 훌륭하게 자라 있을지도 모를 거라고 한다.
할머니가 항상 피던 담배. 이름은 들어봤나... 솔 이라고...
할머니 집은 높은 언덕배기를 올라 자그마한 집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산동네에 있었는데, 옹기종기 모여있던 집들은 도무지 통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집 구조와 하나같이 쨍한 지붕 색을 자랑했다.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한가운데, 다홍색 지붕에 파란 대문을 한 할머니 집이 있었다. 당시 나는 동네에서 가장 어린아이 중 하나였는데, 아침밥을 먹고 나면 동네 커다란 교회 앞 평지에서 언니들과 삼삼오오 모여 얼음 땡, 잡기 놀이, 고무줄놀이 등을 하고 놀았다. 언덕 아래에는 유아용 스프링 말을 잔뜩 태운 1톤 트럭이 하루 종일 동요를 틀어놓고 손님을 받았는데, 나는 그곳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스프링 말을 타고 언덕 중턱의 구멍가게에 들러 보석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채 촙촙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다섯 살 인생에게 가장 즐겁고도 중요한 일과였다. 날씨가 더워질 무렵이면 동네에 방구차(방역차)가 등장했다. 아이들은 누구 하나랄 것 없이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방구차를 따라다녔고, 나 또한 그 어린 집단 광기 한가운데서 누구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방구차를 쫓아다녔다. 나는 아직도 그때 그 골목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장이라도 옛날 할머니 집을 찾으라면 망설임 없이 찾을 자신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십여 년 전 그 일대가 모두 재개발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찾아가고 싶어도 찾아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