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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pr 14. 2022

나의 할머니 (2)

  고등학생 즈음, 아빠의 건강보험증을 열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보험급여 대상자 명단에 할머니도 포함이 되어 있었는데, 할머니의 생년월일을 보고 순간 멈칫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할머니는 1921년생 이셨다. 당시엔 '우와... 우리 할머니 진짜 나이 많다'하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게 다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들과 거친 말투, 아주 강한 남아선호 사상까지. 내가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6.25 발발 시점에 이미 자식을 지켜야 할 어머니였고, 세간살이 남겨두고 몸만 빠져나와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배고픔과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몸소 경험하신 분이셨다. 그땐 왜 몰랐을까. 할머니가 정정하실 때 할머니의 인생사를 직접 여쭤봤더라면 좋았을 걸. 두 번째 기일이 지나서야 떠오른 생각이 못내 아쉽다. 할머니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였는데 말이다.


  사실 나는 할머니의 다정했던 모습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보단 할머니가 야기한 가족 간의 긴장과 싸움에 대한 기억을 찾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싶지만, 굳이 글로 쓰지는 않겠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에 대한 회고와 남은 명예를 모욕할 수 없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할머니는 그 어느 형제의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고생하며 자식을 키웠다는 걸 아는 아들들은 할머니만 등장하면 '아들이 집에서 이렇게 대접받는다'는 걸 과시하려는 듯, 더욱 가부장적으로 변했고, 할머니는 알게 모르게 그것을 부추겼다. 할머니가 머무는 동안 며느리와 손주들은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분위기 속에서 내내 긴장을 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런 저러한 이유로 할머니는 다리 수술을 크게 하시고 요양병원에 모셔지기 전까지 아흔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독거인 생활을 하셨다. 훗날 할머니를 찾아뵈어 내가 둘째를 임신한 사실을 알렸을 때 '아이고~너도 이제 팔자 조졌다'(a.k.a 니 인생 망했다)며 한탄하시던 할머니의 첫마디는 당신께서 자식들에게 대접받지 못한 서러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 었으리라. (할머니는 끝내 요양병원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할머니가 무척이나 미웠다. 내가 태어난 날, 병원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진 '축하합니다. 공주님입니다.' 하는 소리만 듣고 산모도, 아기도 살피지 않은 채 냉정하게 뒤돌아 병원을 나가셨다는 일화도, 아마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집도 끝까지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을 거란 것도, 술에 얼큰하게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아빠에게 한 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네가 뭔데 그러냐!'며 등짝을 거세게 내려치신 일도 모두 차치하고. 할머니는 끝까지 모르셨을 거다. 당신께서 손녀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셨는지.  


  아주 어릴 적부터 이유 모를 공허함에 시달렸던지라, 나는 이미 10대 초반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에 고통받고 있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처럼 소아정신의학과가 성행을 했다면 아마도 분명 소아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찬 바람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참 싫었고, 항상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공간에 아무도 없이 홀로 남겨져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꿈을 꿨더랬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그렇게 지냈기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성인이 되어 뒤늦게 상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아침엔 학교에 출근하고 밤에는 대학원을 다니는 생활이 시작됐다. 이 실체 모를 공허함의 정체를 이해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시작한 그 해 여름, 연수를 듣기 위해 다른 지역에 오래 머물 기회가 생겼다. 살던 곳을 떠나니 비로소 나를 직면할 용기가 생기기도 했고,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그 지역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게 됐다. 상담사는 나의 꿈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곤 거기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마음속 '할머니의 존재'가 튀어나왔다.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애착 대상의 부재의 모든 이유에 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오래되어 잊고 살았던, 나를 내려다보는 그 냉정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날 밤 기숙사에 도착한 나는 그제야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릴 수 있었다. 그리곤 밤새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출처: 니나킴(https://blog.naver.com/wlsthfdlfksp/120167504283)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일이다. 둘째가 생후 5개월을 갓 넘겼고, 할머니께 처음 증손녀를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가 계시는 요양병원으로 갔다. 첫째가 꼬물이였던 시절, 할머니가 증손주를 내려다보던 따뜻한 눈빛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우와.. 할머니도 아기 앞에선 부드러워지는구나, 할머니도 증손주를 반기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간 할머니를 오해한 것만 같아 죄송하기도 했고, 그 모습이 반갑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했다. 할머니는 순하게 안기지 않는 둘째를 보고 역정에 가까운 언짢음을 내 비치 셨다. 그 냉정한 눈빛과 함께. 그랬다. 할머니가 첫째를 따뜻하게 바라본 이유는 첫째가 아들이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아흔 다섯이 지나도, 병원에 계속 누워계셔도,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고 손녀를 만나도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반기지 않았다는게 아니다. 단지 표현방법이 그게 전부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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