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Apr 16. 2022

나의 할머니 (3)

부디 가시는 길은 꽃 길이길

  할머니가 요양병원에서 지내신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할머니는 몇 번의 고비를 힘겹게 넘길 때마다 '숨이 넘어가질 않는다며' 괴로워하셨고 하루빨리 고통이 끝나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 곁을 지키는 가족들도 힘겹던 시기였다. 할머니는 한 번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이내 기운을 차리셨다. 드시고 싶은 것을 찾고, 간병인에게 화도 내고, 가족들에게 한탄도 하는, 지난한 병원 생활이 지속됐다.


  오랜만에 찾아뵌 할머니는 그 사이 많이도 변해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팔과 다리, 수분기 하나 없는 퍼석한 피부와 초췌한 얼굴, 코 끝에 달아놓은 산소호흡기와 줄줄이 달린 링거병, 더 이상의 기력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리고 그렇게나 또렷하던 의식이 깜박이고 있음에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이 머지않았단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왔냐..."


  할머니는 거의 20분 간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그리고 나도 20분 간 같은 대답을 했다. 그날의 할머니는 참 낯설었다. 그 꼬장꼬장하고 자존심 강한 분이 이렇게 작았었나... 자유롭지 못한 노년의 몸을 원망하며 억울할 것도 많고, 서러울 것도 많았던 할머니는 이제 모든 걸 체념한 듯 보였다. 특유의 짜증 섞인 말투까지 집어삼킨 무력감이 병실을 압도했다. 나는 그저 내 이름만 반복해서 부르는 할머니가, 그 흐려진 의식이 낯설어서, 힘없는 목소리와 젖은 눈이 안타까워서, 그저 할머니 손을 잡고 같은 대답을 반복할 뿐이었다. 간호사가 면회 시간 종료를 알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또 올게요."


  사실 할머니도 알고, 나도 알고, 옆에 있던 아빠도 알았다.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걸. 순간 모두가 아는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몹시도 부끄러워졌다. 할머니는 '가라...'며 손을 놓았지만 끝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곤 돌아서는 손녀를 보지 않기 위해 힘겹게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벚꽃이 만개한 4월 초순의 어느 날. 흩날리는 꽃잎처럼 가볍게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숨이 안 넘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고통이 없어 다행이었다. 코로나 시절의 장례라 장례식은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오랜만에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형제들은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영정사진 속 할머니는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을 흐뭇하게 내려보고 계셨다. 훨씬 생기 있고 밝아 보였다.


  오래된 화장터는 나이만큼이나 고목이 많았다. 볕이 따뜻하게 내리쬐었고 포근한 바람이 흐드러진 벚꽃 잎을 흔들어 우수수 꽃비가 내렸다. 이 정도 꽃 길이면 가시는 걸음도 나쁘지 않으리라. 한 줌 상자 안에서 할머니는 훨씬 작아져 있었다. 진짜 마지막이었다.  


  다시 할머니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는 코로나 업무 담당자로, 양가 어른들께 번갈아가며 아이들이 맡기고 데리고 오길 반복하며 정신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할머니는 원래부터 없었던 양, 아무렇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때론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맞다,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지.' 하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할머니는 안 계셨지만, 모든 건 그대로였다. 세상에 한 사람의 존재가 나고 가는게 이토록 아무것이 아닐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도 서글펐다. 한 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했딘. 아이들은 학교에 오지 않지만 교사는 출근을 계속했고, 일과 중엔 쏟아지는 코로나 관련 업무로 화장실 가는 걸 잊어야 할 정도로 바빴으며, 귀가해서는 아이들을 재운 후에 원격수업 영상을 찍고 편집을 했다. 하룻밤에 겨우 3시간만 누울수 있었다. 그나마도 눈을 붙일 수 있으면 다행이련만, 망할 놈의 불면증은 스트레스를 받으니 더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 달 반 뒤, 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머리 위의 링거병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다. '이 딱딱한 침상 위에서 참 많이도 시간을 보내셨겠구나.' 싶어 뒤늦게 눈물이 났다. '새장에 갇힌 새와 다름없다'던 말씀을 단지 푸념이라 여겼었는데,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침대 위에 누워 참 오랫동안 기다렸을 것 같다. 병원에서 나가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날을 말이다. 아들을 넷이나 낳고, 딸도 하나 있는데 요양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셨으니.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그저 가끔 오는 가족들에게 하염없이 푸념만 늘여놓으셨으리라. 그리곤 홀로 남겨진 기나긴 시간을 한 숨으로 채우셨으리라.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약과 링거가 지켜주는 무통의 밤이 편안했다. 꿈에 할머니가 나왔다. 어쩐 일로 곱게 단장을 하고 수줍게 웃고 계셨다. 할머니께 무슨 일이 있냐고 여쭈니 새 시집을 가는 날이라 한다. 잠시 후에 분홍 꽃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높다란 단상 위에 할머니와 처음 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단상 아래 가족들이 화기애애하게 피로연을 즐기고 있었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기쁜 날이기에 나도 자리에 앉아 가족들과 함께 했다. 흩날리는 벚꽃 비를 뚫고 웬 차 한 대가 나타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함께 차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엄마와 통화를 하며 간 밤의 꿈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네가 보고 싶었나 보다.'며 답을 주셨고, 그저께가 할머니의 49재였다고 했다. 덧붙여, 그간 산소 문제로 미뤄왔던 합장(合葬)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헤어진 지 60여 년이 지나, 할머니는 남편 곁에 함께 묻혔다. 꿈 속 수줍은 할머니의 표정이 떠올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할머니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