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기일을 기점으로 내 머릿속은 할머니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종일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 등교 준비에 분주한 아침도, 요가 수련 중에도, 장을 보거나 집안일을 하던 중에도, 심지어 라디오를 틀어놔도 내내 할머니 생각에 압도됐다. 고백 건데, 나는 그간 단 한차례도 할머니를 생각한 적이 없다. 할머니의 빈자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내가 지나치게 무심한 것처럼 느껴져 스스로에게 실망한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할머니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회고하지 않았다. 해결하지 못한 감정 덩어리 또한 그냥 그대로 덮어 두었다. 다시 이것들을 꺼내 볼 일은 없으리라. 나는 확신했다.
그런데 할머니 기억이 떠오르고 나니 나는 도저히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무작정 브런치를 열어 묵혀둔 감정 덩어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안에 남은 할머니의 흔적을 모조리 쏟아내고 말리라.'는 일종의 결기 비슷한 것이 일렁였다. 쉼 없이 키보드를 두드려, 내가 뭘 쓰고 있는 건지 모를 글들을, 도대체 정체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할머니 그때 내게 왜 그랬냐고, 내가 할머니한테 얼마나 상처받은 지 아냐고, 할머니 진짜 해도 해도 너무했다고, 진짜 밉고 할머니가 원망스럽다고. 살아생전 98세의 할머니 앞에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쓰레기 산이 무너지듯 손 끝에서 한 번에 쏟아져 내렸다. 영정사진 앞에서도 덤덤했던 감정의 파도가 봇물이 터지 듯 밀려들었다. 나는 2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할머니의 죽음이 슬퍼졌다.
새벽 2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는 컴퓨터 책상에 앉아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미움과 원망을 쏟은 자리에 그만큼의 미안함과 슬픔이 채워졌다.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뵌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과 앙상하고 주름진 건조한 팔과 다리, 고개를 돌려 떠나가는 손녀를 애써 외면하시던 모습.
나는 할머니가 미웠는데, 할머니는 나를 정말 미워했을까?
기억이야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고 바래지거나, 찰나의 고통과 슬픔, 혹은 아름다운 어떤 것만을 남기고 휘발돼 버리는 것이기에, 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든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화면에 널어놓은 날 것의 감정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행간 곳곳에서 할머니께 사랑받지 못한 서러움과 서운함이 묻어났다. 나는 할머니가 미웠는데,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나 보다. 가슴에 차갑게 박힌 냉정한 눈빛을 걷어내고 나니 그냥 할머니가 보였다. 가난과 억척과 고난의 세월이 아로새겨진 표정 없는 얼굴, 무뚝뚝한 말투, 인색함.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할머니의 두 번째 기일. 나는 이렇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정리해 둔다. 좋은 기억이 많지 않지만, 그냥 잊어버리기엔 너무 아쉬운 날들, 내 인생 초기를 가득 채운 우리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