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을 수 있는 아이의 자유와 커다란 행운
오래전,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학교에는 나와 동갑내기인 상담교사 A가 있었는데, 우리는 각자 학교 내 유일한 특수교사와 상담교사로 분하느라 말 그대로 특수한 고충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A는 종종 답답한 일이 있으면 나를 찾곤 했는데, 하루는 한 학생의 안타까운 사정에 잔뜩 속상해하며 찾아왔다. 학생은 평소 복잡한 가정사로 힘겨워했는데, 전날 새벽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출을 해서 A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A는 자취집으로 아이를 데려와서 하룻밤을 재웠고, 아침이 되자마자 당장 입소가 가능한 청소년 쉼터를 몰색 해 아이를 인계를 한 직후였다. A는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편하게 산 것 같아서... 애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기가 막힌데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애들한테 미안하네. 내가 조금만 어렵게 자랐더라도 애들 입장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말없이 동료의 어깨를 두드리고 꼭 그렇지 않노라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상담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위로를 건넸지만, 속으론 그 말에 깊이 동의를 했다. 아직 어린이 티를 채 벗어나지 못한 10대 초반의 아이가 감내해야 할 것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이 어린아이에게 일찍이 해맑을 자유조차 앗아가는 그놈의 현실이란 게 원망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교사의 무력감이란, 특히나 상담교사의 무력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곤 한다.
사실 나도 너무 평탄했던 내 삶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넉넉하다곤 할 수 없으나 딱히 결핍이라 말할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4인 가정의 장녀로서, 나는 이렇다 할 인생의 위기도, 사고도 겪지 않고 비교적 평탄하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극복하지 못할 충격도, 온몸에 새겨진 공포의 기억들도 담아둘 일이 없다는 건 사실 대단한 행운이다. 나는 나를 평범하게 살 수 있게 해 준 그 행운에 늘 감사하다. 동시에 순탄하게 살아온 내 삶을 몹시도 부끄럽게 느낀다. 그것도 자주.
평탄한 삶이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같은 반 친구였던 B는 평소 무척이나 밝고 쾌활한 성격을 지녔는데, 나는 친하진 않지만 명랑만화 같은 B를 내심 좋아했다. 하루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내가 B에게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B는 '세 명'이라 답했고, 나는 별생각 없이 '외동이냐'라고 되물었는데, 순간 B는 몹시도 당황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른 친구들이 몰려와 B를 위로했고, 앞에서 대화하고 있던 내게 어떤 이유인지 상황을 물어왔다. 하지만 당황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몹시 친한 무리가 생겼다. 그중 예기치 못한 어떤 사건으로 무리 중 한 명이던 C의 가정사가 밝혀졌는데(본인이 원하지 않았던) 그 이후로 모두가 서먹해졌다. C의 해명도, 듣고 있는 친구들의 질문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친구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는 가게에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작고 허름한 가게에서 반겨주시던 친구 어머님의 얼굴에는 한 눈에도 고생하신 삶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나는 밥을 먹는 내내 혹여나 실수를 할 까 봐 몹시 긴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겪지 못했던 친구들의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매우 긴장을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반복할 때마다 매번 당황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몹시 실망했다. 한심한 모질 이, 고생도, 고민도 크게 하지 않고 몸만 커버린 설릭은 풋내기, 익숙한 행운들을 잊고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바쁜 철부지 어린애인 것 같아서, 스스로가 온실 속에 고이 자란 화초같이 느껴져서,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싫었다.
나는 여전히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다. 주로 빈곤하나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을 발견할 때, 가족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강인함을 목격할 때, 녹록잖을 과거와 아직도 이어진 현재를 담담히 살아내는 사람의 묵직함을 느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못 마땅하고 부끄럽다. 내가 순탄하게 살아서, 이들의 삶의 궤적을 감히 함부로 그려볼 수 없어서, 진심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나는 내가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마음의 부채의식에 늘 가슴에 박혔다. 어쩌면 내가 특수교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이런 부채의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린이날 아침. 아이들은 거실 한편에 놓인 선물 꾸러미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늦은 밤까지 포장을 하며 혹시나 마음 한편에 담아 둘까 싶어 사랑을 담아 붙여둔 메모는 채 읽히지도 못하고 포장지와 함께 뜯겨 나갔지만, 딱히 거창할 것 없는 자잘한 행복에도 아이들이 기뻐해 줘서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모를 거다. 평범의 범주에서 맘껏 해맑을 자유를 누린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나이에 맞지 않은 고민들로 일찍 어른이 되도록 등 떠밀 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건지.
사실 부모 된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앞날이 오래도록 평탄하길 바란다. 큰 사건사고 없이, 가능한 한 오래도록 아이의 마음을 가져갈 수 있게 되길. 그리고 나도 남편도 건강하게 지내며 아이들에게 계속 평안한 가정을 지켜줄 수 있게 되길.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그들 앞의 당연한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게 되길 말이다.
* 덧붙임 1
내 유년시절은 못마땅하면서, 내 자식에겐 평탄한 길만 내어주고 싶어 하는 못된 심보는 '부모'의 심정이란 점을 들어 깊이 헤아려주길 바란다.
* 덧붙임 2
사실 내내 불평하느라 몰랐다. 최선을 다해 평범하게 키워주신 부모님의 노력이 무엇이었는지를. 학령기에 IMF를 겪은 자녀세대는 안다. 가계 걱정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시던 부모님의 날과 당장의 걱정들로 한숨이 끊이질 않아도 당신의 자녀들을 키우는 데는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결코 순탄치 않았을 당신의 삶에 자식 만은 순탄한 길을 걷게 해주고 싶었을 부모님의 마음을.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 이제야 알게 돼서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 평범하게, 곱게 키워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