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May 17. 2022

우울할 때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매지

당장은 현재에 집중하자고요

  상당히 씩씩해 뵈는 겉모습과 달리 나는 걱정도 많고, 생각도 많고, 예민하며, 무엇보다도 불안이 높다. 여담이지만, 대략 10여 년 전 심리검사 과목을 수강하며 실습 겸, 재미 삼아 검사해 본 불안 체크리스트에서 종합 90점이 훨씬 웃도는 결과를 얻고는 그 자리에서 너털웃음을 터트린 적이 있다. 워낙 오래된 검사이기도 하고 현재 시점에 바로 적용하기에 부적합한 문항도 많기는 하지만, 덕분에 내내 나를 괴롭게 했던 불안이란 녀석의 실체를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어서 나는 내심 기쁘기도 했다. 여하튼, 온통 나를 흔들어대는 불안 때문에 나는 불안과는 영혼의 단짝이라 불릴 만한 우울이란 녀석과도 자주 만나야 했는데, 번아웃이 오거나 자신감이 떨어질 때면 언제든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 녀석은 내게 익숙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 같은 기분은 영 좋지 않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시시때때로 범람해 오는 우울이란 녀석에게 한참을 휘둘리다 보면 몸과 마음은 잔뜩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그 녀석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우 씨... 내 인생인데 왜 함부로 선을 넘고 XX이야...'   


  나는 녀석에게 고삐를 채우기로 결심했다. 영 떨쳐버릴 수 없다면 날뛰는 망아지의 고삐라도 죄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더 이상 우울을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현실치료(Reality Therapy) :
  - Willam Glasser(1925~2013)가 창시한 심리치료법으로 행동의 선택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 현실치료의 목표는 내담자들이 자신의 좋은 세상을 인식하고 기본적 욕구들을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이다.
  - 현실치료는 선택이론(choice theory)에 근거하고 있다. 선택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은 나 자신뿐이다. 우리는 거의 모든 행동을 선택하고 있으며 불행과 갈등도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선택이론은 불행과 갈등을 비롯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 권석만 저, 학지사






   몸을 움직인 다는 건 가장 효과적인 현재 지각 방법이다. 이미 지나간 사건을 회상하며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머리가 아플 때, 몸의 각성은 내가 과거, 미래가 아닌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자각시킨다. 몸만큼 나의 의지로 통제하기 쉬운 것이 또 없다.(물론 다이어트는 별개의 문제지만...) 몸이 움직이면 불안이 잠들고, 우울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발 밑을 누르는 단단한 땅의 질감, 흔들리는 팔과 다리, 허벅지로 느껴지는 자극과 가빠지는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현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지나간 일은 더 이상 내게 영향력이 없고, 걱정하는 일의 90%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울한 기분은 전적으로 내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계속 걷고 있다. 조금 큰 보폭으로,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가끔 짜증이 밀려와 무기력과 우울이 빼꼼 고개를 들이미는 날엔, 갖은 용을 써 육퇴를 하고 밤 10시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운동화를 단단히 고쳐 매고, 와이어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운다. 폐 속 가득 크게 숨을 들이켜면 하루 중 나를 지치게 했던 일과 아이들의 투정들,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과 참아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어떤 날은 빠른 걸음으로 동네를 10바퀴씩 돌았다. 또 어떤 날은 집 인근의 스포츠 경기장 드라이브 코스를 주파했다. 남편과 싸운 어느 날은 개천에서 시작해 하류에서 합류하는 큰 강을 따라 장장 10km를 걷기도 했다. 그렇게 땀 흘리며 걷고 나면 내겐 후달리는 두 다리 말곤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잔상도 걱정도,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10km를 걸은 다음 날 발바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정형외과를 방문했다. 나는 그날 우울을 보내고 족저근막염을 얻었다. 사실... 적당히 걸어야 한다.)


  




  나는 요즘도 계속 걷고 있다. 다만 휴직을 한 덕분에 주로 낮 시간에 걷는다는 게 달라졌다. 최근에는 두 아이를 각자 학교와 유치원으로 보내고 집에서 2km가량 거리에 있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느긋한 성격의 동행자에 맞춰 느리게 호흡하고, 세상을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보려는 연습을 하며 급하지 않게 쉬엄쉬엄 올라가다 쉬기를 반복한다. 굳이 앞서가려 하지 않고, 앞설 필요도 없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일 따위 일어서서 툭툭 털어내면 그뿐이다. 우울이던, 자괴감이던, 혹은 수치심이거나, 무력감, 다른 무엇이 되었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던, 성공적인 삶이던 아니던.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우울을 선택하지 않는다.

  만일 우울하다면, 그건 단지 내가 우울을 즐기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 반복된 루틴과 단순한 삶이 주는 묘미가 무엇인지 깨달아 가는 요즘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 날을 맞은 늦은 소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