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Aug 24. 2023

산을 타는 이유

"엄마, 왜 산을 '탄다'라고 하는 거야?"

"응?"

"왜~ 산을 '오른다'라고 하지 않고 '탄다'라고 하는 거냐고."


현이의 질문이 날카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산은 왜 '타'는 걸까요?


 "글쎄, 엄마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산 등성이를 올라타서 그런가?"


뚱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엄마의 답변이 영 개운찮아 보입니다.





저는 산을 좋아합니다. 산을 오르며 숨이 가빠지는 것도 좋아하고 타들어갈 듯 열이 오른 다리의 느낌도 좋아하고요. 특히나 열심히 오른 뒤에 맞이하는 산 능선의 달콤한 공기를 좋아하지요.


여름 방학을 시작하며 저는 현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평일 아침마다 집 인근의 산을 오르는 게 어떻겠냐고요. 아직 엄마와 함께하길 좋아하는 9살 아들은 엄마의 제안에 호기롭게 '콜!'을 외쳤어요. 그런데 8월의 산은 아무래도 아이에게 무린가 보네요. 등산 후에 먹는 시원한 수박주스도, 하산 후 동네 어린이 물놀이터에서 시원함을 만끽하는 것도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결국 두 번의 등산 끝에 '더 이상은 노!'를 외친 현이었습니다.


그렇게 방학 동안의 등산 계획을 물거품이 되었지요.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야 있나요. 저는 날을 벼루고 벼뤄, 남편이 휴가를 내고 집에 있는 날 아침에 등산을 가기로 했습니다. 혼자서요. 아이들이 있으니 멀리는 가지 못하고 인근 산의 정상을 찍고 오겠다는 결심에서였죠.


좋았어! 진행시켜!


 

오늘의 예상 코스는 현 위치-체육시설-솔밭정-만보정-욱수정-감태봉을 찍고 같은 길로 복귀하는 것으로 잡습니다. 대략 왕복 3시간 정도면 되겠군요.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씩씩하게 출발해 봅니다.

 

현이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체력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15분 만에 주파해 봅니다. 사실 여기까진 산책로고요. 이제부터 제법 산이다~ 싶은 코스가 이어져요. 지금부턴 죽~~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1년 전엔 잘만 따라오더니... (지친 아들의 뒤태)



저는 산을 오를 때는 주위를 잘 살피지 않는 편이에요.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걸으며 쉬며 경치도 보고 바람도 쐬고 오르시던데, 저는 이상하게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몸을 움직이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산을 만끽할 만도 한데, 생각이 많은 머리형 인간인지라 산을 타면서도 내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가 많아요. 요가를 하며 명상이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인데 역시나 생각을 잡고 놓질 못하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씁쓸합니다. 한편으론 주위를 살피지 않고 목표지향적으로 밀고 나가는 산행 스타일이 제 생활 방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단 생각도 들어요. 앞만 보고 달리다 뒤늦게서야 정작 중요한 걸 놓치는 어리석음을 저는 아직도 반복하고 있거든요. 글을 쓰며 핸드폰에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단 걸 깨닫는 지금처럼요.



오르고 올라...!


오르막길이 계속됩니다. 큰길에서 중간 길로, 좁은 산길을 거쳐 과거로부터 수십, 수백 명이 오르고 올랐을 산길을 따라 오릅니다. 처음 이 길을 지났을 이는 누구였을까요. 문득 얼마의 발길이 닿아야 선명한 산길이 드러나는 걸까 궁금해집니다. 먼저 가쁜 숨을 뱉어내며 이 길을 다졌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위로가 된달까요. 괜히 마음이 울컥거리네요. 아까부터 시끄럽게 가곡을 틀고 가는 저 앞의 어르신도 갑자기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가곡도 제법 들어줄만하군요.


약 10여 년 전엔 산을 참 많이 다녔어요. 그땐 지금보다 젊기도 젊고, 체력도 좋아 10시간이 넘는 산행도 가뿐하게 했었죠.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들끼리는 묘한 동지애 같은 게 느껴져요. 좁은 길목을 교차하며 지날 땐 '너도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동질감으로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안녕하세요~ 수고 많습니다. 앞 길이 미끄럽습니다, 조심하세요.'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나오거든요. 요즘에도 산에서 마주하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인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모르는 사람과 필요이상의 말을 주고받는 것도 민폐 아닌 민폐가 돼버린 것 같아서요. 평일 아침이라 유독 조용한 산길에 마주 오는 아주머니를 보고 반가워 인사를 하려다가 금방 조심스러워져 입을 '합!' 하고 다물고 말았습니다.



다람쥐도 찍고

 


쓴 내 나는 오르막길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제법 올라가고 나선 중간중간 내리막도 있고 너른 평지도 있거든요. 열심히 걷다 산 능선에 다다르면 갑자기 주위 공기가 달달해 지는 걸 느낍니다. 실제로 공기가 달진 않겠죠? 지리산 능선에서 맛본 새벽 안개의 달콤함에 못 미치지만 그래도 제법 달달하게 느껴집니다. 코 끝을 스치는 산 바람을 폐 속 가득 채워 보고, '이거시 인생의 단맛인가?!' 하는 허세도 부려봅니다.


조용한 산길에 사사삭 하는 소리가 많이 들려요. 이곳엔 다람쥐가 많거든요. 토실토실 살이 올라 윤기 나는 털을 보니 먹이도 많고 살기도 좋은가 봅니다. 도심에 있는 산이라 그런지 천적도 없고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 않아요. 그냥 자기 볼 일 다 보다 갑니다. 사람들에게 해코지당한 경험이 없어설까요, 자기 구역에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만보(10000보)를 걸어야 도착한다는 만보정



빠른 걸음으로 부지런히 걸어 출발한 지 80분 만에 만보정에 도착했습니다.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고 숨을 돌리다 보니 옆에서 과일을 까 드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이 처자는 평일에 여기까지 혼자 웬일인가.' 하는 눈치로 보시네요. 땀을 닦는 채 하며 아주머니의 눈길을 외면해 봅니다.(좋아. 자연스러웠어.) 저어기 계속 가곡 틀고 가시던 어르신도 계시네요. 쉬엄쉬엄 다음 길을 살펴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립니다.


"엄마, 언제 와~?"


쭈가 엄마를 기다리다 지쳤나 보네요. 빨리오라는 딸의 재촉에 마음이 급해집니다. 이정표에 다음 목적지를 가리키는 푯말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의 시간은 사치인 것 같아요. 이쯤 해서 하산을 해야겠습니다.


왔던 길을 빠르게 달려 내려갑니다. 혼자 여유 부리며 걷던 길을 뒤로하고 다시 현실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60분 만에 산을 뛰어내려 왔습니다. 오랜만에 등산을 했더니 종아리가 뻐근하네요. 그래도 기분이 좋습니다. 예전에 산을 타던 그때의 기억이 났어요. 누군가 산을 왜 타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아요. 산을 오르고 내리며 살아갈 용기를 얻어 간다고요. 짧은 산행 한 번으로 용기백배가 된 저는, 다시금 용기를 내어 학교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안의 고요가 나를 깨울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