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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pr 19. 2022

매사에 진심으로 살고 싶소만,

집안일은 빼고요...

  지금은 휴직 중이지만, 일하는 엄마의 정체성을 놓지 않고 있는 나는 동료로부터 ‘매사에 진심이란’ 소리를 종종 듣는다. 매 순간 눈앞에 놓인 것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내며 일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영리하지 못한 머리를 커버하느라 늘 손과 발이 바쁜 타입이기도 한지라, 일단 출근하고 나면 ‘적당히’를 모르고 죽어라 앞만 보며 달린다. 덕분에 영락없이 좀비 비슷한 몰골로 귀가하는 날이 많다. 열정 만수르까지는 아니지만 열정 불쏘시개 정도는 하는 내게도 진심으로 임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집안일이다.     


  주부 역할을 시작한 지 어언 9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주부 역할보다는 주부 놀이 정도의 수준이 딱 맞는 사람이다. 신혼기는 좋았다. 그냥저냥 저녁 한 끼 챙겨 먹고 데이트하듯 맛집 투어를 하는 나이브한 생활이 주는 여유로움이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호시절을 길지 않고, 싫은 좋든 주부 역할을 해야만 하는 때가 도래했으니, 첫째의 출생과 동시에 본격 육아전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세상에, 둘에서 하나 늘어 셋이 됐을 뿐인데, 꼬맹이 하나 더 늘었다고 이렇게까지 바쁠 일인가. 매일매일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는 빨래며, 쉼 없이 돌아가는 청소기와 돌돌이, 이유식이 단련시킨 칼질과 요리 솜씨까지. 그렇다. 나의 집안일에 대한 애증의 역사는 육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내게도 요리하는 백 주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일을 쉬고 있어 가장 아쉬운 점은 정리되지 않은 집에 대한 핑곗거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아무도 어질러진 집안이나 정리되지 않은 냉장고, 그릇들, 쌓여있는 빨래 더미에 입을 대지 않지만 모든 일에 실무자가 존재하듯 집에도 엄연히 전담 실무자는 존재한다. 모든 일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표가 붙은 것만 같은 부담감에, 의지와 무관하게 담당자로 지정되어버린 나는 이 모든 일에서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은 현업을 핑계로 눈을 감는 명분을 세워왔다.(지금까지는...)   

 

그래, 나 방금 퇴근했잖아? 저녁도 해야 되고, 애들도 챙기고, 아프면 안 되니까 운동도 해야겠지?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좀 지저분해도 이 정도는 괜찮아..
                                                                                                               - 의식의 흐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여우의 신포도가 생각나 괜히 뜨끔하긴 했지만, ‘이 정도 합리화도 없으면 인간미 없지’하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또다시 들먹이며 눈을 찔금 감아버리기로 한다.(눈에 보일 때마다 스트레스받고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건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휴직기에는 이런 핑계를 댈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일을 쉬고 있는 사람이 집안일은 도맡아 해야지?' 하는 남편의 암묵적 압박에 반박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각자의 사회생활을 위해 온 가족이 회사와 학교, 유치원으로 흩어지고 나면 거실엔 나와 아침의 잔해들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이불과 갈아입은 옷들, 아침식사 준비로 어질러진 싱크대와 식탁, 바구니의 세탁물 등등과 씨름하며 주섬주섬 하나씩 정리를 시작한다. 당장 눈앞의 이것들을 처리하는 것 말고 내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게 슬프다. 지긋지긋한 집안일 같으니.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 시장에 들러 저녁 장을 봤다. 양팔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가자니 잔뜩 성난 승모근이 항의를 한다. 내일은 꼭 카트를 끌고 와야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노래를 틀어놓고 야채를 손질한다. 아무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손이 요리를 하고 있다. 먹기 위해 무언가를 꺼내고 손질하고 볶고 조리하는 행위는 매일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서서 또다시 무언가를 꺼내고 손질하고 볶고 조리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 단지 내 입에 들어가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라는 통념에 슬그머니 합세하여 편하게 살면 될 테지만, 안타깝게도 주부의 저녁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왕 하는 것이라면 맛있는 밥을 해서 퇴근한 남편을 맞고, 아이들을 먹이면 그 또한 작은 행복일 게 분명하다. 그래... 이 모든 게 행복일 테지. 암... 그래야 하고 말고...  이런 마음가짐만 생각하고 산다면, 그래도 어쩌면, 언젠가는 요리에는 진심을 다 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 빨래랑 청소... 냉장고 정리는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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